인터뷰 - 장재령(국악-타악연주자)
덥고 습한 대구의 여름 낮.
재령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른다. 난간에 매달리듯 의지해 바닥만 보고 걷고 있자니 지금이 몇 층인지 감도 오지 않는다. 1시간 전만 해도 예쁘게 세팅되어 있던 머리는 땀에 절어 3일은 감지 않은 듯 보였고, 시폰 원피스는 몸에 들러붙어 움직임을 더욱 둔하게 만들었다. 고개를 들어 층수가 적힌 판을 확인하니 15층, 재령은 20층까지 가야 한다. 올라가자니 못 하겠고, 다시 내려가자니 다 온 것 같다. 한숨을 푹 내쉬는 재령. 1층에서 엘리베이터 고장 사실을 알았을 때 바로 에어컨 설치 기사님께 전화를 드릴 것을… 신혼집 입주 전에 에어컨을 달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이 사달을 만든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어차피 기사님도 에어컨을 들고 계단을 올라오기는 힘드실 텐데, 생각이 짧았다. ‘지금이라도 설치일을 미루는 게 나을까…’ 고민하며, 손끝으로 에어컨 설치 기사의 연락처를 찾는데, 뒤에서 ‘띠링-’ 하는 엘리베이터 도착 음이 들린다. 엘리베이터가 이렇게 금방 고쳐지는 거였다고?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재령은 ’문이 닫힙니다’하는 안내음 소리를 듣고 나서야 현실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를 놓칠 새라 후다닥 달려가 버튼을 누른다.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중력을 거스르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린다. 여유가 생기자 거울 속 자신이 눈에 들어오는 재령. 재령의 입에서 망했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재령이 속한 팀 ‘판소리 제작소 소리담기’의 공연 영상을 찍기로 한 날이라 특별히 신경을 썼건만, 지금 몰골은 아예 씻지도 않은 듯 보였기 때문이다. 팀 언니들의 잔소리는 둘째치더라도, 영상 속에 이 모습이 영원히 박제될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오늘부로 팀을 탈퇴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어쩌겠는가. 재령은 손 드라이로 머리의 뽕을 조금이라도 살리려고 애를 써본다. 그때 재령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확인해 보면, 에어컨 기사님이다.
“네, 기사님. 벌써 도착하셨어요?”
“아뇨. 앞의 집이 좀 늦어져서요. 어쩌죠? 1시간 정도 늦을 것 같아요.”
“저도 뒤에 일정이 있는데…”
“죄송합니다.”
“예약 날짜를 변경하면요?”
“아… 저희가 여름에는 스케줄이 풀이라 오늘 취소하시면 가을까지 기다리셔야 될 거예요.”
망했다. 1시간이라니. 그냥 에어컨 설치를 취소할까? 그러면 다시 스케줄을 잡아야 하는데, 예약이 언제 잡힐지 모르니 여름 내내 뜨거운 집에서 살아야 한다. 영상 촬영을 뒤로 미루는 건? 팀 스케줄이라 몇 달 전부터 리더 언니가 개인 일정은 뒤로 미루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절대 안 된다. 이런 저런 해결책을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집. 현관문을 여니 뜨거운 공기가 재령을 덮쳤다.
“헉”
그것은 재령의 마지막 남은 이성이 날아가는 소리였다. 오늘은 정말 하루 종일 되는 일이 없다. 재령은 온 몸에 힘이 죽- 빠지는 것을 느꼈다. 다 때려치우고 바닥에 대자로 드러눕고만 싶었다. 그리고…
“아… 커피 한 잔만 마시면 소원이 없겠다.”
♪
어째서 커피냐, 한 모금 쭉- 마시면
커feel이 들어온다고 해서 커피다
과일 향에 에티오피아
높은 산미 케냐
밸런스 좋고 맛도 좋은
아싸라비아 콜롬비아 신의 눈물 게이샤
마시기 편한 브라질
싸요 싸요 값이 싸요 많이 마시면 많이 싸요
종이컵엔 맥심 유리컵엔 아이스
머그컵엔 뜨아 텀블러는 할인
운전 중엔 별다방 햄버거엔 맥스루
케익엔 커피 쿠키에도 커피
잠이 와도 커피 잠 안 와도 커피
해장에도 커피로다
맛이 좋사이다
- 판소리 제작소 소리담기 <바리스타령> 중에서 ♪
재령은 어떤 종류라도 좋으니, 아이스 커피 딱 한 잔만 마시면 살겠다 싶다. 더위를 먹은 것인지 머리가 핑- 돌고 관자놀이가 찌르는 듯 아파져 온다. 재령은 자신도 모르게 휘청이는 몸을 벽에 기댔다. 그런데 벽에 닿은 팔뚝에서 냉기가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반가움에 퍼뜩 고개를 들어보니 어제 배송을 받아 설치해 놓은 냉장고였다. 재령은 묵직한 냉장고 문을 힘겹게 열어 냉동실 안으로 상반신을 구겨 넣었다. 재령의 작은 몸이 냉장고에 얼추 맞아 들어간다. 시원한 냉기가 온 몸을 빠르게 식혀준다. 열기가 내리자 두통도 조금씩 가라앉는다. 과부하가 걸려 멈춰버린 재령의 생각 회로도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어제 냉장고를 받으러 왔을 때 먹다 남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냉장실에 넣어두었다는 사실이었다. 재령이 냉장실 문을 열자 얼음이 거의 녹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커피 컵이 재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령은 플라스틱 커피 컵의 뚜껑을 열어 차갑고 검은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커피는 재령의 마른 입술을 촉촉하게 적시고,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찐득하게 말라붙은 침을 개운하게 씻어냈다. 되는 일 하나 없던 하루에 숨 쉬기도 버거웠는데, 커피 한 잔이 숨통을 틔어준다. 냉기 서린 깊은 한숨이 재령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 그제서야 재령의 눈에 틈틈이 가져다 놓은 이삿짐 박스와 열려 있는 욕실 문이 들어온다.
번뜩- 재령의 머리에 찝찝한 상황을 뽀송하게 만들 묘수가 떠오른다.
씩 웃으며, 휴대전화로 에어컨 기사의 연락처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는 재령의 손.
화면 위로 바리스타령이 다시 흐르며 소리 점점 커진다.
화면 암전 되며,
끝.
본 프로젝트는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 - 예술로]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으며,
커피하면 떠오르는 촉감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한 후 작성한 짧은 트리트먼트 글로
본 프로젝트에 나오는 모든 에피소드는 픽션(허구)입니다.
*트리트먼트란
: 소설처럼 대사보다는 상황과 인물의 내면, 인간관계, 갈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줄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