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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민 Apr 11. 2023

알맞은 중고책

누런 손때 묻은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문맥 한 덩어리

충분히 소화될 때까지
꼭꼭 씹는다



책을 곱씹어 읽는다. 언제든 문득 떠오를 때 서둘러 꺼내 읽어 내려가야 한다. 그러기에, 빌려 읽는 것은 마음이 껄끄럽다. 책장을 넘기는 것도 불편하거니와 마음을 소통한 문장에 손을 맞댈 수도 없다.

더군다나 첫 만남부터 헤어질 날을 함께 통보받음은, 시리도록 잔인하다.  

그러기에, 난 손때 묻은 내 책이 좋다. 

  





중고서점을 찾는다.

오랜만에 친구와 약속이 있는 날이다.


“우리 중고서점 들렸다가 커피 마실까?”
“그래. 나도 사고 싶은 책 있어. 거기서 보자.”     


호주머니 속 빳빳한 오만 원권을 반듯하게 접어 넣는다. 걸을 때마다 바스락 거리는 거침이 설렌다.


얼마 전 처음 접한 임경선 작가의 글의 온도에 매료됐다. 센 언니 느낌이 물씬 풍기는 글에 어깨를 기댄다. 오늘, 여기 있는 임경선 작가의 중고책을 털어갈 작정이다.


평소 읽고 싶은 책들을 중고서점 사이트에 들어가 차곡차곡 캡처한다. 드디어 쇼핑리스트를 마음껏 개방하는 날이다. 구역별 숨어 있는 보물들을 콩딱 거리는 가슴을 머금고 찾아낸다.

그리고 B51구역에서 친구와 마주했다.


“뭐야. 이렇게 많이 사?”
“나 요즘 미친 듯이 읽어. 도피성 독서지.”


우리는 책 더미 속에서 크크 거리며 웃는다.

마흔 인 우리다.

가슴 가득 채운 책에 괜스레 뿌듯해진다.     



‘평범한 결혼생활’에서 만난 임경선 작가는

‘비범한 나의 결혼생활’에 한마디 거들 거 같았다.


“야. 신경 쓰지 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 센 언니 느낌을 오롯이 즐기고 싶어 곁을 내준 다음 이야기, ‘엄마와 연애할 때’.


집으로 돌아와, 난 다른 임경선을 만났다.

자기애 가득한 차가운 언니는 귀여운 꼬마 앞에서 맥을 못 추고 말랑 인다.

그 모습이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책장 한 장 넘기기 아쉬워 아껴 읽는다.     






새책의 신선함과 달리 묵직한 중고책이 주는 맛이 있다.   

  

첫 번째 주인과 소통한 스르륵 그은 실선이다.

너무 연하게 그려진 선에 여러 생각이 찾아온다.


이 책이 너무 소중해 조심히 그은 것일까.

본인과 맞지 않아 되팔 생각에 살며시 그은 것일까.


그 그어진 문구에 그 사람의 삶이 녹아있다.

나와 다른 실선. 나와 다른 인생관.

같은 책에 우린 다른 가슴 저림을 느낀다.     



가끔은 보물찾기 같은 메시지를 발견하다.

책 첫 장을 넘겼을 때 적힌 짧은 편지를 발견한다.


'감정은 패턴이다' 첫 장에 써진 편지


자신을 너무 사랑함이 짧은 메시지에 묻어난다. 그런데 어떠한 연유에 이 소중한 책을 어쩔 수 없이 내놓은 것일까.

그래서 더 소중히 곱씹어 읽는다. 






멀지 않던 과거엔, 책과 그리 가깝지 않았다.

정확히 내 관심사에 관한 책과 그리 가깝지 않았다.


특별한 꼬마 덕분에, 발달과 관련된 책을 많이 접해야만 했고 그 외 시간은 아이를 위한 놀이 자료를 만드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내가 보고 싶은 책을 읽는다는 것, 아이에게 다소 미안했었다. 더군다나 키지도 않았다.

그렇게 여유 없이 몇 년을 살았었다.


그러다 겹겹이 쌓인 아픔을 글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글이 매끄럽지 않아 시선이 갔

지금은, 그것에 미쳐있다. 


책을 읽는 동안은 내가 그 속에 살아간다.

도피성 읽기로, 그 끝에 전달받은 묵직한 메시지를 안고 돌아 나온다. 그 뭉클함에 오늘을 살아간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책장은

새책에서 느낄 수 없는 부드러움을 선사한다.

타인의 손때를 이미 한 번 쳐간 그것은

내 손길이 살짝만 스쳐도 스르륵 넘어간다.

그 부드러움에 임경선 작가와 나,

스르륵 소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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