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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민 Jul 10. 2023

한여름에 에어컨이 고장 났다

위기를 극복하는 우리들의 자세


여보. 큰일 났어!


외출 후 돌아온 집은 아수라장이었다. 바닥 매트는 이미 뜯겨있었고 흥건히 젖은 수건과 걸레는 서로 뒤엉킨 상태였으며, 속을 훤히 내보이며 서 있는 에어컨에 사태의 심각성을 지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리저리, 뜯고 살피는 남편을 그저 바라만 봤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지금 하는 모든 행위가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결국 상판까지 뜯은 남편에게 묵혀있던 답답함을 내뱉었다.

“거기는 왜 뜯는 거니.”


결국, AS센터에 전화를 걸었고 출장이 밀려 일주일 후에나 방문가능하다는 청천벽력 같은 답변을 되돌려 받았다. 바깥온도 32도, 7일의 시간 동안 우리에게 위기가 닥쳤다. 우린 어떻게든 이겨내야 한다.     


다행히도, 안방 작은 에어컨은 살아있었다. 우린 그 공간에 옹기종기 모이기 시작했다.


“붙지 마.”
“엄마. 시율이 유치원 보내세요!”

올라가는 불쾌지수만큼 불만은 새어 나왔고, 이대론 7일을 버틸 수 없겠단 생각이 앞섰다. 집 주변 물놀이장은 개장 전이었고, 급하게 갈만한 곳은 찾기 어려웠다. 그리고 문뜩 떠오른 것은, 물풍선놀이였다.


부글부글 화가 난 아이들에게 커다란 종이에 악당을 그리자고 제안했고, 시후는 게임캐릭터(반반유치원) 시율이는 겨울왕국 캐릭터를 이야기했다.

그림을 출력 이쁘고 깔끔하게 붙이고 싶었지만, 선풍기 한 대로 돌아가는 거실에서 사치였다. 없는 솜씨로 주문한 캐릭터를 그리고, 아이들은 색칠했다. 그러는 동안 조용히 화장실에서 물풍선을 제조했고, 전투력이 상승한 우린, 모든 것을 가지고 베란다로 나갔다.


“자. 악당이 나타났어!! 무찌르자!!”


신이 난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물풍선을 던지기 시작했고, 나중엔 서로에게 주고받기 시작했다. 오빠의 손길이 살짝만 스쳐도 ‘오빠 미워’를 말하던 시율이는, 시후가 터트린 하늘색 물풍선에 까르르 웃었다. 그렇게 우린 74개의 물풍선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악당, 하얀 벽과 바닥에 붙은 알록달록 풍선 파편, 흠뻑 젖은 두 아이.

앞으로의 노동이 눈에 훤히 보였지만, 아이들의 미소에 전투력이 상승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베란다 청소해 볼까?”     


힘차게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 베란다 끝부터 내려오는 묵은 먼지와 파편들.

끈적이는 얼룩이 매끄럽게 바뀌는 그 순간, 지난 내 마음속 묵은 먼지가 씻겨 내려갔다.

분명, 청소가 주는 희열이 있다.






그러나 그 시원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는 땀,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끈적이는 불쾌함에 아이들은 이구동성 외쳤다.

“더워요!”     


마음이 급해진 남편은 손과 눈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얼마 후 결의에 찬 언행에 아이들 눈은 반짝였다.


“아빠가 에어컨 고쳐줄게!”


미덥지 않아 그저 지켜만 봤다. 역시나 에어컨을 열었고, 두꺼운 손을 깊숙이 넣어 물이 떨어지는 위치를 확인했다. 묶여있던 배관호수를 풀어보고, 이것저것 눌러보고, 만져보는 일련의 과정이 이어졌다.

‘후’, 깊은 호흡과 함께, 배관에 검정 물체가 쑥 하고 빠져나갔다.


“찾았다.”
“막혔던 거야?”     


배관이 막혀 물이 에어컨 안으로 다시 역류했던 것을 남편이 찾아냈다.     

하나에 꽂히면 그것을 해결할 때까지 미련을 못 버리는 그의 성격이 답답했었다. 그러나 오늘,

그 거슬렸던 집념은 에어컨을 고치는 성과는 일궈냈고, 불같던 주말끝자락, 화려한 찬바람을 선사해 준 남편이다.    

       





당연하게 누리던 것을 잃었을 때, 막막함에 모든 것을 멈췄다.

그렇게 멈춰 섰을 때, 멈춰 섬을 즐기면,

새로운 것을 누릴 기회가 제공된다.     


물풍선 74개가 가져온 1000원의 즐거움.

얼룩진 베란다힘찬 물줄기가 씻어낸 상쾌함.

거슬렸던 집념 속 숨어있던 남편의 금손이 얻어낸 출장비 절약.     


에어컨 고장이라는 위기 속, 우린 많은 것을 얻은 3일이었다.      


“여보 에어컨 AS 취소했어?”
“응. 당연히 바로 취소했지.”
“출장비 굳었네. 저녁 시켜 먹을까?”
“뭐 먹을래?”

아이들은 이구동성 외친다.

“짜장면!”



분명 돈을 내고 먹는데, 공짜로 먹는듯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뭘까?



사진출처(엔딩)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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