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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해슬 Jul 11. 2022

왜 그랬을까?

몇 해 전 5살 아이와 함께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버스에 올라타니 만원 버스였다. 아이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기어이 빈 의자를 찾아갔다. 나도 이리저리 몸을 비틀고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부딪히면서 아이를 쫓아갔다. 만원 버스의 인간 방어막을 뚫고 한참 뒷자리에 비어있던 빈 좌석에 앉은 아이. 아이가 흔들리는 버스에서 서서 가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나는 아이가 앉은자리 앞에 섰다. 버스 내부 구조상 내가 서 있는 뒤편에는 의자 위에 손잡이가 없었다. 게다가 아이 자리 앞에만 의자 뒤에 붙어 있는 플라스틱 손잡이도 한쪽이 뜯어져서 잡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불편해도 아이가 앉은 의자의 머리가 닿는 윗부분에 손을 놓았다.       


의자의 윗부분에 손을 놓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내 손등에 올려지는 누군가의 손. 흠칫 놀라며 눈을 돌리니 아이의 대각선 뒤로 앉은 성인 남성이었다. 그 사람의 옆에는 보기에도 크고 무거워보이는 보따리 같은 짐이 3개나 있어서 한쪽 좌석은 짐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 남성은 창가 쪽이 아닌 통로 쪽에 앉아 있어서 내 손을 잡기 수월했다. 성인 남성이기에 불쾌감을 드러낼 수는 없고 희미하게 웃으면서 손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손으로 내 손등을 힘주어 누르면서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흡사 때밀이 타올로 손등의 때를 미는 듯한 느낌에 당황스러웠다. 이 사람이 왜 이럴까? 하면서 더욱 힘주어 손을 잡아 빼려고 하는데 그가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사람은 많았지만 버스 안이 시끄러웠던 건 아니다. 하지만 불분명한 발음에 작게 웅얼거리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내 손을 열심히 문지르면서 끊임없이 말을 했다. 불쾌감과 당혹스러움이 뒤섞여서 그를 바라보았다. 살집이 있는 건장한 몸에 짧은 머리카락, 그의 눈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또렷하거나 반짝이듯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낯선 이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행동하면서 하는 말마저 웅얼거리니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아, 이 사람은 지적 장애인인가 봐.’     


명확히 들리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며 내 손등을 열심히 때 미는 그. 많은 짐을 들고 버스를 탄 이 사람은 분명 목적지까지 내릴 수 있는 지적 능력은 갖추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버스 안에서 모르는 이에게 함부로 신체 접촉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은 배우지 못했을까? 아니면 교육을 받았는데도 잊어버리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일까? 보호자 없이 다닐 수 있을 정도면 그의 지적 능력은 나쁘지 않겠지만, 상대방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것이나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것 등은 그에게는 훨씬 어려운 문제인 걸까? 타인의 손에 잡혀서 꼼짝할 수 없었던 내가 그를 바라보며 계속 생각을 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나를 향해 뭐라고 중얼거리는 그를 보고 말했다. 


“저.. 괜찮아요. 네, 저 괜찮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하핫.”     


‘하지 마세요.’ 정작 필요한 건 이 직접적인 거절의 의사였을 테지만, 나는 그에게 단호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저 웃으며 우회적으로 사회적인 거절의 표현을 썼다. 내 말을 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받아들이기 싫었던 건지 알 수 없던 그는 조금 더 내 손등을 열심히 문질렀지만 결국 나는 손을 빼냈다.      


“아, 네, 괜찮아요. 괜찮아요.”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은 이것뿐이었다. 이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린아이와 함께 버스를 탄 여성이었다. 건장한 체구의 그가 혹시라도 내 말과 태도에 기분이 나빠져서 어떤 해코지라도 할까 봐 두려웠었다.      


나에게 하는 그의 행동을 보며 버스 안 내 주변을 둘러싼 이들은 나를, 또 그를 모른척했다. 그들이 그의 행동을 관심 있게 봤는지 안 봤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를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와 그의 관계가 아무것도 아님을 전부 알면서도, 나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한 아주머니가 이쪽을 보며 그를 비난하는 듯이 빠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나에게는 들리지만 그에게는 들리지 않는 아주머니의 혼잣말. 나와 아주머니의 눈이 마주쳤지만 서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거리가 있었다. 아주머니의 혼잣말은 그를 향한 비난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향한 위로였을까?  

   

내 주변을 둘러싼 고요한 눈길을 느끼면서 나는 손등을 한번 더 잡혔다. 움직이는 만원 버스에서 손잡이로 잡을 만한 곳이 아이가 앉아 있는 의자 말고는 없었기에. 그는 또 열심히 때를 미는구나, 라는 느낌을 받으며 속으로는 난처함에 멋쩍게 웃었다. 어쩌면 그는 직업이 세신사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관련 일을 배우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손을 자주 씻어야 한다는 어떤 강박 같은 걸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지금 그는 자신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나에게 열심히 설명을 해주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때를 밀어야 하는 연습 상대가 필요했는데 마침 내 손을 보니 깨끗하게 보이지 않아서 딱이었다든가.   

  

붙잡혔던 손을 다시 뺄 때도 여전히 내 답은 한결같았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뭐가 괜찮았던 걸까? 누구에게 향한 괜찮다는 말이었을까? 아무도 내리지 않고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내 주변인들? 아니면 완곡한 거절의 표현을 알아듣길 바라는 그에게?     


내려야 하는 정류장에 다 와서 아이를 데리고 힘겹게 만원 버스를 빠져나왔다. 혹시나 그가 나를 쫓아올까 봐 다른 정류장에서 내려서 걸어가야 할까 하는 걱정도 살짝 했었다. 그렇지만 그러기엔 나도 아이도 지쳐있었다.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으므로. 정류장에서 내릴 때까지 나를 쫓아오면 어떡하지?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커다란 짐을 3개나 곁에 두고 있던 그는 나를 따라 내리지 않았다. 버스는 창 밖을 보는 요지부동인 그를 데리고 다시 출발했다. 역시나 그 사람은 자신의 목적지를 찾아갈 줄 아는 지적 능력을 갖춘 이었다. 내 걱정은 그저 망상일 뿐이었다.     


지금도 한 번씩 그때의 일이 떠오른다. 그날 나는 왜 단호하게 하지 말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그가 건장한 성인 남성이 아니라, 우리 아이와 같이 어린 아이거나, 나처럼 작은 체구의 여성이었다 해도, 난감한 듯이 웃기만 하면서 괜찮다고만 말했을까?      


그 사람의 행동은 불쾌하고 무례했지만, 버스 안 아무도 그에게 이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알려주지 않았다. 그의 보호자가 아니니까.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나 역시도 이런 행동은 불쾌감을 준다고 제대로 의사 표시를 해야만 했지만, 막연하게 두려웠다. 나보다 건장해 보이고 지적인 장애를 가진 것 같은 그가 갑자기 벌컥 분노를 표출할까 봐. 그 누구도 그에게 타인의 손을 만지는 건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란 걸 지적하지 않았다. 그날 버스 안의 모두는 각자의 이유로 편견을 갖고 그를 멀리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아이들에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도록 그림책도 읽어주고, 평소에도 장애인 인권 개선을 위한 책이나 유튜브가 나오면 한 번씩 본다. 나는 내가 사회적 약자를 보며 편견을 갖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날 현실에서 마주한 내 모습은 내 이상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했다. 

우리는 정상인과 비정상인이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고 배웠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첫걸음은 단어에서부터 온다고 해서 기억해두고 있다. 신문기사나 뉴스에서 장애인이기에 부당하게 당하는 일을 보면 분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를 마주한 순간, 나는 막연히 두려웠고, 그와 대화가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도 버거웠다. 언젠가 또다시 이 비슷한 일을 겪는다면 그땐 하지 말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게 될까? 왜 하면 안 되는지 상대에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머릿속에서만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존중했던 못난 내 모습을 안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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