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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해슬 Jan 11. 2022

아주 가끔은 당신을 생각합니다

기억 속 할머니를 떠올리며

고정순 작가님의 그림책 신작 <옥춘당>이 인터넷 서점에서 예약 판매 중이다. 정식 출간은 1월 15일이라고 했다.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최혜진 저) 책을 통해서 고정순 작가님의 전작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고, 그 이후 맘에 드는 그림책은 현재 내 책장에 꽂혀 있다. 가난하지만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족을 그려온 고정순 작가님이라 이번 신작도 기대가 되었다. 이 책 <옥춘당>은 작가님이 유년시절부터 봐온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야기이다. 제목 ‘옥춘당’은 제사상에 올라오던 알록달록한 사탕이다.



내 기억 속 옥춘당도 어렸을 적 할머니가 차리신 제사상에서 처음 보았다. 알록달록해서 제사가 끝난 뒤 꼭 먹어보리라 하고 맛을 보았다가, 막상 기대했던 단맛이 아니라 인상을 찌푸렸던 기억이 난다. 나름 사탕이라고 엄마나 아빠는 나와 남동생에게 더 먹으라고 권했지만 절대로 싫다고 거부했던 게 틀림없다. 이젠 옥춘당의 맛이 기억조차 나지 않으니 말이다.



늘 한복을 입고 머리를 쪽진 뒤 비녀를 꽂았던 할머니. 한복의 색은 연하고 빛바랜 색이었다. 소복은 아니지만 한결같이 광택도 별로 없는 그걸 항상 입고 계셨다. 싸니까 같은 걸로 여러 벌 사두셨던 걸까. 옷장을 한 번도 열어본 적 없어서 모르겠지만, 신기하게도 할머니는 볼 때마다 한복 차림으로 평생을 사셨다. 할머니의 생년월일을 들으며 ‘아, 정말로 일제강점기 시대 때 태어나셨던 분들이 계셨어!’ 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작가님 책 속의 할아버지, 할머니와는 달리 어린 시절 기억 속 우리 할머니는 술에 취해 계셨다. 아빠는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래로 동생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가난한 집의 장남이었다. 아빠와 막내 고모의 나이 차이가 거의 스물 가까이 되니 어깨가 한 짐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할머니가 왜 그리 술만 드시는지 아빠께 여쭤본 적이 있었다. 아빠 말로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잘 사는 편이었는데 할머니가 자꾸 사기당해서 재산을 탕진하셨다나.. 할머니는 그 뒤로 홧병이 나서 술에 의존하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장독대에 쪼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던 할머니의 모습도 기억이 난다. 성인이 된 이후로 한 번씩 그 모습을 떠올리면 할머니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으면 담배라도 피우면서 시름을 달랬을까 하며 애잔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어렸을 땐 그 모든 게 다 싫었다는 거~



혼자 계신 할머니와 우리 가족, 게다가 친척들 모두 각기 다른 지역에서 살았다. 어렸을 적 우리 집이 너무나도 힘든 시절에 나랑 남동생을 잠깐 할머니 집에 맡겼었는데, 술에 취해서 울며 주정하는 할머니 손을 붙잡고 시장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아주 우울한 분위기의 기억이다. 그걸 안 엄마가 치를 떨어서 그 이후엔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를 절대로 할머니 손에 맡기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할머니도 알코올 의존증을 벗어나시고, 담배도 점차 줄이시더니 (신기하게도) 건강상 별 무리 없이 지내셨다. 아빠의 고향으로 이사 오고 스무 살이 넘은 이후로 가족끼리 한 번씩 찾아뵈면 할머니 방에선 구리구리한 냄새가 났다. 그때 할머니 연세는 거의 70이 다 되셨다. 고양이 한 마리 키우며 자유롭게 사셨는데, 동물의 냄새와 노인네 특유의 냄새가 뒤섞였기 때문이다. 나도 성인인지라 차마 (아빠 앞에서) 대놓고 말은 못 했지만, 아빠가 한 번씩 가자고 말을 할 때마다 가기 싫어서 난감했다. 더러운 방바닥, 꼬질꼬질한 이불과 요, 거기에 엉킨 고양이 털, 식사는 제 때 하시지만 고양이 밥그릇을 볼 때면 저 뼈만 남은 생선이 과연 누구의 몫이었나 하며 찜찜하기도 했다.



엄마는 갈 때마다 걸레질하면서 까맣게 묻어 나오는 걸 보며 질색하셨다. 나중에는 갔다만 오면 온몸이 가려워지는 것 같다며 더 이상 더러워서 못 가겠다고 최후통첩을 날리셨다. 아빠는 효도는 셀프라는 걸 인정하시고선 그 뒤론 본인이 혼자 자주 찾아뵈며 할머니방 청소를 했다. 아빠 역시도 비슷한 걸 느끼셔서 그랬다는 후문이..


엄마는 점점 더 편찮아지셨고, 동생은 타지 생활, 나는 직장생활을 하느라 바빠서 할머니를 찾아뵙는 건 아빠의 몫이 되었다. 일주일에 5번은 뵈러 가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엄마는 ‘나한테나 좀 잘해주면 내가 업고 살지!’ 하며 툴툴대셨지만 효도는 셀프니까. 아빠는 하루 종일 계시는 건 아니고 청소와 빨래 도우미로 나서서 활동하셨다.



우리가 아빠의 그런 행동에 말없이 수긍했던 건 늙어갈수록 부모에게 잘못한 것만 생각난다는 심정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내가 나이를 먹고 나서 한 번씩 엄마 아빠의 과거를 여쭤봤었다. “어렸을 때 어떻게 사셨어요? 어떤 추억이 있으셨어요?” 내게도 기억나는 것들이 잔뜩 있는데, 오랜 세월 살아온 우리 부모님이라고 다를 것인가. 어떤 일들은 더 생생하게 박혀있다. 그땐 그랬지,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감정의 파편들과 함께 말이다.



아빠는 아무래도 할머니께 잘못한 게 많으셨나 보다. 엄마 말로는 아빠도 소싯적에 꽤나 반항을 했다고 한다. 나이 들어서는 사는 게 팍팍해서 자주 연락도 못 드렸고, 이제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되고 효도가 가능해졌는데 아빠가 보기엔 할머니께 갚아야 할 게 많은데 사실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으니, 더 후회되고 초조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엄마는 “그 노인네, 나보다 더 오래 살 것이다!” 하며 코웃음을 치셨다. (엄마는 오랜 지병을 앓고 계신다.) 하지만 넘어지는 데에는 장사가 없다든가. 여성의 골다공증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났다. 길을 걷다가 넘어진 할머니는 뼈에 금이 갔고, 그 뒤로 요양병원에 머무르게 되셨다. 나도 애가 둘이라 뼈에 구멍이 송송 있는 느낌이 있는데, 아이를 주렁주렁 낳고 이제는 연세 지극한 할머니는 오죽 더 그러셨을까.



효도가 셀프라서 아빠가 할머니를 모시지 못한 것은 아니다. 아빠가 할머니를 애틋하게 여기면서도 평생을 함께 살지 않은 건, 다름 아니게도 두 분의 상성이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성격상 두 분은 강강이라 붙어 있으면 금방 언성이 높아졌다. 할머니의 자유로운 영혼과 아빠의 가부장적인 성격이 두 분을 함께 하기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하게 요양병원에서 살게 된 할머니. 병원에 갔을 때 침상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눈에 선하다. 하얀 머리를 쪽지고 비녀를 꽂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요양보호사가 머리 감기기 편하게 스포츠형의 아주 짧은 머리카락을 하고 있으셨다.. 빛바래고 무광택의 단출한 한복을 입었던 할머니는 요양병원의 이름이 잔뜩 박힌 환자복을 하루 종일 입게 되셨다. 그래도 집에 가자고 안 해서 다행이라고 말하던 엄마 (다시 말하지만 할머니의 자유로운 영혼을 감당할 사람이 없다.)의 말에 아빠도 수긍하셨지만, 아빠는 요양 병원만 갔다 오면 몰래 우셨다고 한다.  



그리고 할머니는 어느 날 80 몇 세의 일기로 삶을 뒤로하고 돌아가셨다. 나의 시할아버님과 시할머님이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 엄마와 아빠가 그럴 것처럼, 그리고 또 언젠가 나와 남편도 대학병원 중환자실보다는 요양병원이 낫다 싶을 것처럼, 여기서 생을 마감하셨다.



기억 속 할머니는 단편적인 모습뿐이었다. 긴 시간을 함께 지냈던 어린 시절은 떠오르지 않고,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에는 하룻밤도 같이 잔 적이 없다. 뭐든 빨리 끝내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했던 아빠 때문에. 유년 시절에도 성인이 된 이후에도 할머니를 떠올리면 어떠한 감정적인 느낌은 별로 없다. 여러 상황들이 겹치면서 함께 보내기 어려웠고 자주 뵙기 쉽지 않았던 게 조금 안타깝고 아련한 정도다.



오히려 할머니를 떠올리면 아무래도 아빠를 더 많이 생각하게 한다. 아빠와 할머니의 관계를 보면서 우리 시절 무뚝뚝한 가장이었던 아빠를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어려서는 마냥 무섭고 말없던 아빠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뒤돌아선 길에서 눈물을 애써 훔치던 환영이 그려진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왠지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은 중년의 아버지의 눈물.



할머니가 돌아가신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아빠는 지나가는 폐지 줍는 노인분들을 보면 할머니가 생각난다고 하셨다. 아주 작은 키에 살이 없는 마른 몸. 구부정한 등, 이가 다 빠져서 틀니를 해도 입 주변이 홀쭉하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 그 어느 곳을 바라봐도 ‘고생 꽤나 한 사람이오.’가 드러나던 할머니가 그분들과 겹쳐 보인다고 하셨다. 그런 아빠를 보면 ‘그러길래 있을 때 잘하셨어야죠.’라는 말이 목까지 가득하지만,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갚는다는  건 아무리 긴긴 시간을 함께 보내도 다 갚지 못하리란 걸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 할머니의 추억은 여기서 마치고. 나도 우리 부모님 곁에 계실 때 잘해야겠다. 있을 때 잘해, 란 말은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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