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대보름 놀이

가야금 독주곡 '대보름놀이' 창작기록

by 가야금 하는 희원


돌담길은 생각보다 투박하고 거침없지만, 이상하게 정이 갔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왔던 그날은 명상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도 모르게 마음을 푹 내려놓고 순간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돌담길은 명상을 하는 산책로이기도 했지만, 모험을 떠나는 통로 같기도 하였다. - '앨리스'의 상상을 사유하는 시간 '돌담길'기록 中-


지난 기록, 돌담길에 이어 소녀가 도착한 곳은 단란한 마을이었다.

담백한 온기, 고즈넉한 지혜, 현재가 있기까지의 시간이 오순도순 모여있는 듯하다.

난 이런 공간에 가면 왜인지 우리의 존재가 귀여워진다. 우리도 우리의 삶이 처음이라 모든 것들이

대단해 보이고 최초인 듯 생생하지만, 옛사람들이 지나온 세월이 없었다면 우리의 시간도 연결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겸허해진 나는 온순한 미소를 지으며 마을을 돌아본다.


오늘은 마을이 평소보다 떠들썩했는데 '정월대보름' 행사가 있기 때문이다. 정월대보름은 매년 음력 1월에 첫 보름달이 뜨는 날로,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달집 태우기, 부럼 깨기 등 액운을 쫓고,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기 위하여 여러 놀이를 진행한다. 걷다 보니 2개의 장승 사이에 여러 사람들이 북적북적 모여있다. 저마다

형형색색 종이에 자신의 소원을 적어 나무에 매달고 있다. 예쁜 색상의 종이와 즐겁게 웃는 사람들의 모습에 이미 홀라당 넘어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소원종이를 적고 있다. 몇 개의 소원을 적을지 머릿속으로 굴리다가 가장 소중한 소원을 골라 적었다. 그렇게 여러 장의 소원종이들이 모였고, 이는 잠시 후 달집 태우기에서 불로 태워져 소원을 염원하는 놀이를 한다고 하였다. 여러 장의 소원종이가 모이자 사람들은 소원종이를

매단 줄을 들고, 달집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그 줄은 거인의 거대한 목걸이 같기도 하였다.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1열로 선 사람들의 얼굴엔 기대감과 설렘이 있었다. 옆에선 풍물놀이의 흥겨운 선율이 들려온다.


달집에 도착한 사람들은 목걸이를 매달듯 소원줄을 매달고 조심스럽게 불을 붙인다. 처음에는 망설이듯 불이 붙을 듯 말 듯하다가 어느새 활활 불이 타올랐다. 사람들의 환호성에 힘입어 불은 하늘에 닿을 듯 치솟았다.


'소원과 자연 그리고 불이 만나 완성되는 염원의식'



나는 타오르는 불을 보면서 벅차오르기도 했지만, 평소 무속음악 등 한국의 전통의식에 관심 많았던 나는 이 상황이 매력적으로 끌리기 시작하였다. 순수함을 담아 간절히 기원하는 모습, 무아지경으로 의식에 몰입하는 상태, 소원 염원을 놀이로 풀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이 모습에서 난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동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릴 적 크리스마스 때 산타할아버지가 오기만을 기원하며 소원을 적고 기도하는 모습처럼 말이다.


우리 인간은 점점 어른이 되면서 맑은 순수함을 잃어간다. 때론 순수함이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철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정월대보름날 만큼은 소원종이에 자신의 소원, 가족의 소원 등을 적으며 마음을 마구 건드린다. 사라지지 않은 채 잠들어있던, 또는 건조하게 굳었던 동심은 다시 일어나 움직임을 되찾고, 놀이에 금방 몰입한다. 몰입은 점점 에너지를 받아 고조되고, 우린 무아지경 상태에 빠진다. 마치 놀이터에서 지칠세라 뛰어노는 아이처럼 말이다. 이 과정에서는 정돈되지 않은 거친 날 것의 감정, 미친 듯 타오르는 에너지와 열정이 폭발하면서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고, 나아가 치유의 과정까지 도달한다. 난 굳어있던 마음이 날 것으로 폭발해 치유되는 흐름을 음악으로 담고 싶었다. 달집 태우기의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처음에는 놀이를 유혹하는 악마처럼 사람들을 홀리게 하는 선율이 등장한다.

안개처럼 스며드는 빵 냄새의 부드러운 유혹, 혀를 감싸 안을 듯 달콤한 초콜릿의 맛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이 상황은 놀이의 세계로 접어드는 인간의 귀여운 반항 같기도 하다. 아이처럼 순수한 감각을 건드리고, 홀린 듯 놀이에 참여하는 모습이 누군가를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놀이, 이 부분에서는 달집 태우기의 모습이 나온다. 해맑은 사람들의 모습, 간절히 바라며 진지하게 참여하는 모습들이 상상된다. 이 부분에서는 평소 금기시되는 불장난을 이 놀이에서는 안전한 범위 내에서 행하는 '일탈'이라고 바라보았다.

일탈이 허용되는 이 짜릿한 순간을 느려지고 점점 빨라지는 등 속도에 변화를 주어 잔망스럽게 표현하고자 하였다.


곡의 마지막에는 놀이의 핵심인 '불과 소원의 만남'이 절정을 이루며 화려하고 신나게 마무리된다. 마치 은하수의 수많은 빛들이 쏟아지듯 빠르고 유려한 가락들이 장구 장단과 함께 등장한다. 소원을 염원하는 마음과 에너지가 절정을 향해 달려가면서 우리의 강렬한 순간을 역동적으로 표현하였다. 사람들이 이 곡을 통해 소원이 불을 만나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느끼며, 놀이를 음악으로 체험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돌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