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hori Sep 22. 2018

Editology

창조는 편집이다

 '창조는 편집이다'라는 작은 타이틀이 좋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움이 나오는 방식은 여러 가지 형식을 통해서 나온다. 그것을 하나의 편집이라고 부른다면 부인하기 어렵다. 문화심리학자라는 저자의 생각을 읽으며 나는 제품, 서비스 기획의 과정과 비교하며 이해한다. 본질의 구조가 유사하다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경험과 사고에 대입해서 이해하는 것이 편하다. 본질을 유지하고, 기술적 변화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변에 심리학 박사가 있다고 심리학이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도 그의 생각처럼 내 나름의 편집 영역이다.


 지식 체계 구축의 기본단위인 개념 하나 스스로 만들 수 없다면 '창조사회'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들이 집필한 '축적의 시간'을 한 줄로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다. 사회생활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은, 시간이 흘러간다고 지식의 축적이 반드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흘러도 같은 수준에 머무는 사람이 더 많다. 세상의 변화에 알량한 수준의 대응이 점점 어려워지는 이유다. 하던 대로의 과정을 넘어서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자유롭지 않다. 하던 대로의 관성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도전이 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지식과 문화, 관점과 장소, 심리학이란 세 꼭지는 새로움을 찾아가는 길을 다양하게 열어두었다. 작가의 산만하고 솔직한 심정, 에피소드가 다른 듯 같다.


 지식과 문화라는 분야는 쉽게 읽힌다. 저자의 경험, 사회적 유명인에 대한 분석을 보면 재미있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는 현상과 과정을 보며 왜 그런지 인간의 관점에서 들여다보는 설명 때문이다. 설명이 강의실 분위기가 아니라 일상용어처럼 다가와 쉽게 읽힌다. 


 관점과 장소에 대한 두 번째 꼭지도 재미있다. 음악, 미술 등에 대한 작가의 이해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소재로 나온다.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다. 한 가지 다른 생각이라면 동양의 멀티플 퍼스펙티브에 관한 것이다. 많은 데이터 베이스를 축적해서 메타데이터로 활용할 수 있는 것으로 가야 한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나는 근대라고 정의된 이후에 나타난 서구의 방식이 동양의 것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의문을 갖고있다. 효과적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지금 그 방향에서 달려오던 우리도 일정한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온고이지신의 분위기도 많다. 그것도 불변의 법칙은 아니다. 


 일이관지라는 말을 통해서 동양은 더 많은 데이터를 두루 넓게 꿰는 방식의 중요성을 훨씬 오래전에 깨달았다. 아니 세상에 존재하는 지식인들은 벌써 이해해왔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유효할것 같다. 동양은 신분제도와 사회적 제도가 이런 지식권력을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는 체제가 되지 않았다. 개념 정립과 실행의 큰 차이가 감당할 수 없는 차이를 만들어냈다. 동양의 지식인들이 비겁하다는 점도 공감하고, 한 집안의 씨를 말리는 동양의 제재를 감안하면 그런 정리가 존재한 것도 다행이다. 풍선효과처럼 다른 방향으로 뚫고 나갈 길이 적었다는 점이 차이를 더 크게 만들었다. 하지만 프롤로그의 말처럼 동양에서는 개념의 정리가 서구보다 뒤처져있지 않다. 


 요즘의 대세인 인공지능이란 것도 서구의 체계적이고 과학적(합리적)인 방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일이관지 개념과 수학적 시스템을 편집해서 만들어 간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동양적인 바둑에 도전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왜 바둑이 알파고의 연습 방식이 되었을까? 단순하게 수학만 잘하던 학생에서 경영, 경제, 예술 등 관련 없어 보이는 것을 가르치지만 그 불규칙적인 상관관계의 패턴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성취가 있으면 사람에게는 '지혜로운'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기계에게는 인공지능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하지만 사람의 영역은 기계보다 포괄적이다. 본질을 응용하기 때문이고, 기계는 학습을 통해서 인공지능을 구축해도 분야가 제한적이다. 사실 창의적이지 않다. 그런 기계를 고안한 사람이 창의적인 것이다. 


 공부(학업이 아닌 삶의 공부)해서 공부의 본질과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를 깨닫는 과정과 비슷하다. 그 깨달음이란 인간이 사유하는 것이 인공지능의 깊이보다 훨씬 뛰어나다. 인간이란 자원이 갖은 유일한 장점이다. 인공지능이란 효율적이다. 하지만 창의적이라는 것은 인간의 방향성(저자의 말처럼 editology)에 따라 제약을 받는다. 이런 부분에 있어 동양은 오래전부터 발달되었고, 자로 재고, 측정하고 데이터를 만드는 것은 서양이 훨씬 낫다. 그 다름의 반목이 과거 150년 전쯤이라고 하며, 지금은 바야흐로 서로 화이부동의 문화적 편집의 시기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읽으면 가장 재미있게 본 부분은 세상의 문화가 사람의 사고와 방향성에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관념적으로 생각하던 것보다 그의 예와 설명이 폭넓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확대 해석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문화의 이면에 남아 있는 것을 한 발 떨어져 보는 재미가 있다. 지금 세상의 테두리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그 밖에서 지금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상상을 한다는 것은 삶에 있어 중요하다. 그래야 why(왜?), what(그럼 무엇을), how(어떻게 해볼까)하는 생각의 재구성을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식인의 비겁함을 말하는 학자와 행동을 실천하는 용기 있는 실천가 어디쯤을 또 우리는 방황한다는 것이다. 만약 지식인처럼 비겁하다면 성공의 다양한 방식보다 무너지지 않는 치밀함을 선택한 것이고 용기있는 실천가라면 성공과 실패의 이익과 위험을 더 많이 선택한 것이다.


 심리학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는 조금 지루하다. 관련 지식이 많지 않기에 이해가 부족하고, 고로 관심과 몰입이 되지 않는다. 오늘 비행기가 취소돼서 내일 아침에 공항에 가야 하고, 조금 있다 '안시성'을 보러 가야 해서 일지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문화심리학자의 이야기인데, 세상에 뜨거운 기술적 흐름과 그 논리구조가 유사하다. 용어의 유사성도 있다. 분야가 달라서 그가 바라보는 세상과 기술적 방향이 눈으로 보는 것은 다르지만 지향점이 유사하다. 그것이 이 시대의 문화가 갖는 역동성이자 요구사항이다. 편집을 통해서 개념을 만들어 내는 것은 동시대의 권력이다. 사람의 생각을 디자인하거나 생각이 그 권력의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일이다. 나는 최소한의 자아 정체성과 디그너티를 확보할 자유를 즐기면 살고 싶다. 완벽한 자유란 인간에겐 또 편집의 대상일지 모르는 일이다.


#독서일기 #khori #에디톨로지 #editolog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