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hori Mar 05. 2019

못된 상사(上司)를 갈구는 발칙한 상상 10

무한한 가능성은 collaboration으로 열린다

 조회수가 며칠 계속 늘어나니 이쯤에서 만족하고 그칠 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짜내기를 하다 망가지게 되어 있다. 


 사회적으로 못된 행동은 법과 제도로 규제가 된다. 그런데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고 한다. 나는 법은 멀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자에 보면 왕이 있는지도 몰라야 나라가 잘 굴러가듯, 법이 있는지도 몰라야 세상은 잘 돌아가는 것이다. 이 법과 제도를 이야기하기 시점이 문제가 발생하고 사람 간의 조정이 임계점에 달했다는 말이다. 그 많은 가능성과 타협을 배제하고 법을 찾는 것은 작은 욕심을 위한 천박한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며칠 전에 신문 기사에서 '90년대 생은 다르다'라는 기사를 봤다. 그 기사에 그려진 과장은 우리가 쉽게 말하는 '개차반'이다. 젊은 직원에서 서류를 던지고, 인사 모독성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젊은 직원은 쿨하게 한 번 대들고 퇴사했다는 이야기다. 기사를 읽다가 아직도 그런 몰지각한 놈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나는 이런 몰지각한 부류의 시작은 가정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지식을 쌓고 똑똑하면 뭐하나? 우리가 집안의 대표로 사회생활을 하듯, 차반이도 집안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가정교육을 들먹이며 싸울 수는 없는 현대 사회의 교양인이다 보니 울화통이 터지는 것이다. 사람이 개를 물면 신문에 난다. 내가 스스로 낮아져서 똑같이 하기엔 많은 직장인들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기사를 보면 속상한 것은 올바른 소리를 한 약자가 경기장을 박차고 나가서 waver공시가 되는 것이다. 반칙과 편법을 일삼은 못된 행동을 하는 놈은 경기장에서 선수 대우를 받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직업은 과거에 농사짓고 밭 갈고 하는 수단과 마찬가지다. 직업을 잃는다는 것은 다이어트도 아닌데 강제로 밥줄을 끊겠다는 상황이 자의던 타의던 벌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직원 정신을 갖고 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사장님이 사소한 잘못으로 심하게 막말을 하고 짜른다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아저씨!!!!"하고 한 마디 할 것이다. 노동계약을 했을 때 직원이고 사장님 아닌가? 그런데 주인정신을 갖은 사람도 아니고 나랑 같이 직원 정신으로 사는 사람에게 부당한 대우와 처우, 인신 모독과 같은 수모는 참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기사에서 젊은 직원이 회사에 남고 못된 과장이 제재를 받아 개과천선하는 권선징악이 현실에서는 먼 것이 문제다. 우리는 동물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세계에 살고자 한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왜"라는 물음과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호기심이 필요하다. 못된 상사의 행동이 일관성 있게 나오면 하나의 정책이 되고, 어깨 위에 머리가 달린 많은 사람들은 머리를 굴려서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혼자서 잘 안되면 머리를 맞대고 협력을 해야만 한다.


 나도 회사를 다니면 상사라는 작자가 갑자기 회의실에 들어와서 눈 한번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구조조정 블라 블라, 어떻게 몇 명을 짤라야 하는데 블라블라'하는 소리에 격분했던 적이 있다. 화가 난 이유는 그래도 오랜 시간을 같이한 동료이자 후배들에게 예의도 없이 회의하는데 느닷없이 와서 하는 행동 속에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양반도 본인 의지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런 일을 좋아하는 가학적 변태가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나? 만나기도 힘들다. 위에서 시키니 또 자기 살겠다고 허우적대는 삶이다. 측은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도 동료들보다 직책과 지위가 있고 또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책임감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조금 참으면 이익이 생길 수 있지만 그런 일의 압잡이가 되어 살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집안 대표로 세상에서 나왔으니, 집에 들어가서 면목이 없는 나의 초라한 모습을 안고 살아가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상사에게 '인사평가를 빵점 줄 권한이 당신에게 있지만 사람을 해고하겠다면 대표이사 위임장을 받아오세요'라고 한 마디 했다. 이런 거 보면 내가 사람들에게 동공 지진을 자주 일으키는 원흉인 것도 같다. 원칙과 규칙의 테두리에서 부당한 일에 대해서 대응하면 조금 힘든 과정일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동료들이 나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이익이 생기면 그늘에 쉬고, 그렇지 않으면 돌아설 수도 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실력과 품격을 높이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조용한 힘이기 때문이다.


 결국 유야무야가 됐다. 회의실에 난입해서 싸가지 없이 말했다고 상사의 상사한테 된통 깨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이 정말 훈계였는지, '누가 이따위로 일처리를 했어'인지는 알 수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할 일을 다시 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동료들도 삶의 터전을 지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족은 아니지만 동료들이 결혼하고 아이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3~4명의 생계가 달려있다. 회사 직원들 수에 3~4명만 곱해도 엄청 큰 인원이고 내가 다니는 기업과 협력하는 기업들을 포함하면 많은 사람들이 직장생활을 통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연결되어 알게 모르게 돕고 협력하면 살아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나 혼자 떠나서 다른 곳에서 직원 정신을 갖고 살아가도 된다. 그래서 가족보다 많이 보는 동료들의 신뢰가 못된 상사들을 제압하는 가장 큰 힘이다. 신뢰란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삶의 저축을 하는 것이다. 가끔 그 신뢰를 금전으로 바꾸면 사기꾼이 된다. 내가 보면 어려움은 나 혼자 살겠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당연히 일정기간 일제시대처럼 요시찰 인물이 된 것 같다. 요시찰 관찰 대상 기간이 짧은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동료들과 더 협력적으로 일하고 서로 돕는 구조가 강해진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내가 일하는 기업에서 협력을 통한 강력한 조직력, 정보력을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무모하게 아무곳에서 영웅심리에 나서는 것은 옳지 않다. 화가 난다고 못된 상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욕을 하거나 하는 것도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다. 하지만 물러나지 말아야 할 때는 물러서지 않아야 한다. 한 명의 영웅이 기록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영웅 도전자가 제단에 제물로 바쳐졌는가? 그러나 협력을 통한 도전은 많은 success story를 안고 있다. 병자호란, 임진왜란이 혼자 나가서 정리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거의 한 세대 정도를 경쟁이란 이름하에 살아온 세대일지 모른다. 품앗이, 두레와 같은 교과서에 미풍양속은 사라졌지만, 현대 시대에 맞게 collaboaration (협동, 협력이라고 하면 되는데 괜히 좀 더 있어 보여서)은 인간 세상에서는 필수의 덕목이다. 기술자들이 사용하는 open innovation도 마찬가지다. 기업에서 하청업체가 아니라 협력사라고 말하는 이유도, 상대방에 대한 정의를 통해서 좀 더 발전적인 방향을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 8시간 아니 그 이상을 옆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끼리 신뢰와 협력을 잘 구축하지 못한다면 남의 탓만 할 것이 아니다. 


 석농 화원에 '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나니 그때 수장한 것은 한갓 쌓아두는 것과는 다른 것'이란 말이 있다. 유홍준 교수가 이를 다시 멋지게 표현한 것으로 알고 있다. 못된 상사는 볼수록 깊은 빡침이 올 수도 있고, 넌덜머리가 날 수도 있다. 여유가 생길 때까지 또 그들과 깊이 있게 시간을 보내는 고통을 감수해야 가까이 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들도 친구와 지인들이 있는 것을 보면 유유상종인지 이중인격인지 직장생활만 그렇게 하느지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똑같이 부하로써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고 서로의 장점을 권하고 배우다 보면 협력은 자연스럽게 생긴다. 분야에 따라서 그 방면의 재주가 있는 사람이 스스로를 낮춰서 사람들과 함께 하고, 또 타인의 배려에 감사를 표현한다면 못된 상사란 말도 좀 사라지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그 못된 상사가 진정한 용기가 생기면 사과를 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또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 인지 상정이다.

 잘못된 길을 시작하면 되돌아가서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도전이 아니라 너무 많은 길을 방황한다면 삐뚤빼뚤 걸어온 삶의 발자국을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이 후회가 될 수 있다. 시간 나면 자기 나이만큼 책도 읽고, 공부도 하면서 실력과 품격을 쌓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그래야 사표가 아니라 평등한 노동계약에서 회사를 해고하는 통쾌함을 만끽할 것 아닌가? 


P.S. No more!!


#직장생활 #직장상사 #협력 #collaboaration #khori

이전 09화 못된 상사(上司)를 갈구는 발칙한 상상 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