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과 과거의 두 도시로 읽힌다
일고십 덕분에 고전 소설을 조금씩 보게 된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두 도시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펼쳐지는 시대의 소식을 천천히 읽으면 나는 이것이 소설 속의 이야기인지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 이 곳의 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지금도 시대적 배경이 달라도 새로운 변화, 구체제의 잔상이 혼재한 혼동의 세상이란 측면에서는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럼 현재 내가 살아가는 시대도 혼란의 시대인가? 아쉽게도 그렇다는 생각을 한다. 책 속의 두 도시와 다르게 소설 속 과거의 도시와 현재의 도시도 끊임없이 같은 문제를 안고 고민한다. 사람들은 참 갑갑하게 반복되는 리바이벌의 귀재들이다.
책 속에서 찰스, 루시, 마네트 사이에는 다양한 이야기와 숨겨진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복선이 착실하게 곳곳에 펼쳐져있다. 소설의 재미는 뒷장에 펼쳐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소설의 마지막 장이 예측되고 그것이 맞아떨어지면 흥미가 떨어지기도 한다. 그런 점이 좀 아쉽다.
1789, 프랑스 대혁명의 시대에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벌어지는 혼란의 시대는 거리감이 있다. 차라리 최근에 본 '항거, 유관순 이야기'처럼 이 땅에 있었던 혼란의 시기, 더 가깝게는 한국 전쟁, 43 항쟁, 518과 같은 비극의 이야기는 이 땅에 훨씬 많다. 대혁명처럼 약자들의 통쾌함이 있던 시절도 아닌 인간의 파괴적 본성의 소용돌이가 몸부림치던 이곳에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책은 혼란의 시기에도 사람이 이타적으로 타인을 위해서 살신성인하는 숭고함을 이야기하고 그 중요성을 말하고자 한다고 생각된다. 그것을 헌신이라고 할 수 있지만 루시와 시드니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일방적 헌신은 인간에게 성인군자, 종교적 구도자의 길을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든 종교 서적을 보면 무엇을 해라, 무엇을 하지 말라고 기재되어 있다. 인간은 그것을 항상 지키지는 못한다. 아니 지키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줄 알면서 그것을 통해서 구속하는 구조가 가끔 달갑지 않다. 물론 그런 지침이 인간이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불만의 요인은 스스로가 아니라 그 지침이 스스로에게 향해야 하나 인간은 이를 통해서 타인을 분별하고 차별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세상은 혼란스러워진다.
나는 시드니처럼 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시드니는 소설 속에 존재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마치 공자, 예수, 부처, 마호메트가 수 천 년 전에 존재한 것처럼.. 그런데 2-3천 년이 지나도 그런 존재가 재현되지 않는 이유를 인간이 타락하고 순수함을 잃어버렸다고 하기에는 뭔가 허전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소설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숭고한 정신을 하나의 등불처럼 밝혀준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면 살려고 한다.
#찰스디킨스 #두도시이야기 #독서 #khori #일고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