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hori May 19. 2019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

좀 더 살아봐도 별 차이 있겠나?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 난 그렇다고 대답한다.


 책 표지 설명에 따라 서가명가 팟캐스트도 들었다. 나는 우리 사회의 의식 수준이 경제발전 수준만큼 올라가지 않는다면 지속적인 불균형은 유지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21세기의 현장을, 20세기의 사고방식으로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관점에서 저자가 불신, 불만, 불안이라는 3불 키워드를 통한 현상 진단에 동의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 품격(格)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한다. 그 핵심에 저자가 말하는 정치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도 잘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를 움직이는 큰 힘은 자본과 권력이다. 이들을 통제하는 것은 합의된 제도다. 합의된 제도가 항상 만인에게 평등하지는 않다. 대다수의 의견에 부합하기 위해서 소통하며,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공화제에 부합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Bottom up방식으로 교육을 통한 사회 개혁과 지속적인 혁신이 더 바람직하다. 그러나 지난 과거의 교육이 정치와 제도에 의해서 이용된 역사 또한 존재한다.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의 여건에서는, 제도를 만드는 정치 품격의 선행이 필요하다. 이 제도가 사회적 문화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는 압축 고도 성장이 품고 있는 후폭풍에서 자유롭지 않다. 


 결과 분석에 대한 공감과 달리, 조망하는 관점에 작은 차이가 존재한다. 저자가 좀 더 구체적인 의견과 주장이 있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베이비붐 세대다. 전환 세대라고 일컫는 중간을 논하지 않고, 에코세대라 불리는 30대 이하를 논하는 것은 사회의 연속성 측면에서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할아버지의 경험과 생각을 손자 세대에게 말하는 것은 의미 있지만, 부모세대의 경험과 관점을 빼면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에서 장유유서라는 말은 예절과 존경의 의미도 갖지만 권력의 의미도 존재한다. 소통은 같은 높이에서 생각을 교류하는 것이다. 세대를 넘어서는 소통도 그러해야 한다고 믿는다. 경험이 많다는 것이 실력을 보증하지 않는다. 실력 있는 사람이 경험이 많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 사회를 앞서 구축한 노고에 존경을 표하지만, 이용후생과 실사구시의 입장에서 현안을 처리하는 일에는 실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정주영에 많이 할애된 그의 장점과 동시에 현대에서 두부공장을 운영했다는 풍문, 정경유착이 가려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이 가능한 시대가 아니다. 에코세대에게 정주영은 거리감이 있는 존재다. 미래세대에게 이야기를 한다면 지금의 적절한 사례가 더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과거 집중적인 자원 투입을 통해 선택적 시장의 성장을 이루었다. 사회단계처럼 산업발전도 단계저긴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고착화되고 고도화된 경제구조 속에 있다. 결과에 대한 처방은 현재에 유효한 방식을 찾아야 한다. 문제는 다양한 분야의 생산성이 떨어지고 일이다. 새로운 성장동력에 대한 도전도, 협력보다는 각자도생의 형태로 나타난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본능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지금 생산성이 떨어지는 문제는 과거에 준비가 부족한 탓이다. 따라서 가장 급한 것과 중장기적으로 사회에 필요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 이 관점에서 정치를 보면 퇴보적, 20세기의 늪에 빠져있다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먹고살만해졌는데 왜 우리는 불만, 불안, 불신을 갖는가? 이 문제는 과거의 원인을 반추해야 하지만, 21세기 오늘의 눈으로 새롭게 바라보아야 할 문제다. 과거를 분석한 이론과 과거의 경험만으로 현재를 제단 하면 문제가 된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방법도 모른다. 경험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소통한 내용을 바탕으로 냉철한 분석과 대책이 필요하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인간은 다양한 욕구를 갖게 된다. 사회가 발전된 만큼  다양한 욕구를 수용할 제도를 갖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불균형을 잡을 노력을 하고 있는가? 지금의 사회 이슈 통해서 다양한 계층이 법앞에 평등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법의 해석을 상황에 맞춰해도 별 문제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 법이다. 이 문제의 접근 방식만 보아도, 우리 사회의 품격이 경제발전만큼 높지 않다는 것은 드러난다. 분배,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는 더 심각하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기초적인 신뢰 문제가 커지면 사회적 틀이 깨진다. 


 그런 점에서 베이붐 세대, 전환 세대는 책임이 있다. 그 앞세대는 더 큰 책임이 있다. 공과는 명확해야 한다. 에코세대가 살아가는 경기장의 규칙은 베이붐 세대 이전부터 지금까지 누가 조정하고 바꿔왔는가? 이 문제가 세대 간 격돌로 나타나고, 1인 1표의 시스템에서 다수가 민주주의 방식이란 이름으로 횡포를 부려도 견제할 방법이 없다. 그 주도권을 잡은 세대에게 읍소할 일이 아니라 미래 세대와 현재 세대가 다 같이 살아갈 방향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주류, 기득권과 불협화음이 나오고, 주류는 좀더 보수적인 제도를 강요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기득권의 근본적 출처에 대한 부당성을 제기한다. 하지만 불만족스럽더라도 합의를 통한 제도로 조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잘 안된다. 여기서 자신의 밑바닥 품격이 나온다. 조정의 권한을 갖은 현 시대의 주류 세대가 분발해야 하는 이유고 반성해야 하는 이유다.


 베이붐 세대는 평생고용, 저 경쟁 환경에서 노력을 했다. IMF 때에도 30대라 그 윗세대들이 조정 대상인 경우가 많다. 민주화의 노력을 평가하지만 더 적게 지식을 쌓고 사회에 나왔다. 후 세대의 평가에서 쉽게 사회의 주류가 된 경우가 많다. 전환 세대는 그 폭풍이 지나간 후, 새로운 룰에 적응해야 했다. 그 규칙은 나온 이유에도, 그 규칙을 설정한 권한도 없었다. 지금 에코세대는 집에서 곱게 자라서, 사회에 황금 열차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야생의 경기장에 나와 있다. 부적응, 고학력에 대한 자부심을 보면 이런 반응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종종 나보다 쉽지 않은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는 청춘들을 보면 미안하고 또 응원한다.


 베이붐 세대도 그런 생각을 하는가? 제도에 대해서 후세가 극복하라고만 하기에는 기성세대의 진실된 반성과 조금 더 균형 잡힌 제도를 만들 품격 있는 행동이 요구된다. 품격은 말이 아니라 행동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70대 노인이 일제시대 힘들었다는 뉴스 인터뷰가 기만적인 것은 일제시대라고 해봐야 겨우 포대기에 누워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익을 위한 행동속에도 최소한의 사회적 균형감각이 필요한 시점이다.


 교육을 백년대계라고 한다. 사회적 제도의 혜택은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를 겨냥해서 설계한다. 금호동의 주택개발의 현상을 바라보며 경제발전만이 아니라 그곳의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잘 살도록 어떤 제도를 시행해서 실과 득은 무었이었나?를 남겨야 할 시점이다. 그저 외관상 발전하지 않았나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만족과 추억이 있겠지만 전환세대와 에코세대에게 무슨 교훈이 있는가? 베이비부머 세대도 왜 우리 손자 손녀들이 왜 힘들게 사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 분명 손자 세대가 주류가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려되기도 한다. 그것이 사회적 갈등이고 근시안적인 대책과 제도가 만드는 악순환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하나, 협력적 사회가 되어야 한다. 저자도 같은 의미의 마무리를 하고 있다. 에코세대에게 힘들지만 주어진 환경을 잘 이해해서 우리처럼 발전하라는 말은 분노를 만든다. 현실성, 변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공감대를 만들기 어렵다. 이렇게 세대간 소통이 어려우면 발전적 방향과 품격은 더 멀어진다. 태극기 집회, 직장생활에서 바라보는 베이붐 세대를 보면 사실 기대가 크지 않다. 전체로 비약해서는 안 되겠지만, 경쟁 중심으로 살아온 그들은 이기적인 경향이 높다. 에코세대가 나약한 것 같지만, 그들은 합리적인 배분과 협력에 보다 유연하다. 세상은 초연결이란 기계를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협력적으로 연대할 것인지를 묻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루어지기도 힘들고, 내가 결정할 수 없는 환생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만 우리 아이가 나의 뒤통수를 보고 자라고, 에코세대가 전환 세대의 뒤통수를, 전환 세대는 베이비부머의 뒤통수를 보며 자라왔다. 좋은 것을 배우기도 하지만, 사람의 경험상 궁지에 몰리면 과거에 배운 효과적인 나쁜 행동을 사용할 개연성이 높다. 상선약수와 같이 善이 세대를 흘러 넘겨줘야 하는 의무는 모든 세대의 의무다. 이렇게 품격은 하루아침이 아니라 서서히 차곡차곡 쌓인다. 인간의 품격도 하루도 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니다. 


#독서 #성장판성편단1기 #이재열 #21세기북스 #khori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