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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hori Jan 26. 2017

새해! 멘토는 가라!

세상에 무릎 꿇지 않은 그대를 위해서

 청춘의 꿈을 안고 사회 생활을 시작한다. 인생의 미래에 대한 각자의 꿈과 계획을 갖는다. 청춘의 호시절이 이젠 누구나 갖는 기회가 아닌 것이 현실의 슬픔이다.

 전적으로 이런 시대의 방향으로 몰고오고, 청춘들의 미래를 고려하지 않은 결과다. 따라서 지금 이런 시대를 만들어낸 앞 세대들의 반성이 필요하다. 그들이 나의 자식, 조카라면 세상의 매운 맛만 보게 하겠는가? 그 청춘들의 세대가 우리들의 자식, 조카, 소중한 미래 세대다. 그런데 현실의 규칙과 여건 속에서 잊던가, 외면하던가의 문제가 존재한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청춘들이 사회 생활을 적응하는 어려움을 말하려고만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배우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의 어려움이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리더와 멘토라 불리우는 누군가를 찾고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사람,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나거나 완벽함을 나타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찾지 못한 것일지 모른다.

 어찌되었던 내 주변에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는 기대와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멀리서 기대를 갖고 바라보며 갈망하던 모습과 차이가 있다. 이것이 인간 세계의 딜레마다. 나는 누군가가 주변의 지인을 내 삶의 멘토라고 하는 말을 잘 믿지 않는다. 내가 그냥 닯고 싶은 사람 또는 부러운 사람의 모습이 나를 동기부여 할 수는 있지만 상호 교감하고 리딩해주는 관계 없이 내 삶의 멘토, 구도자란 지칭이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희망을 지워버리기 어렵다. 어느정도 중년의 나이가 되어도 나를 이끌어주고 나의 문제를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을 함께 나눌 사람을 기대한다. 현실은 희망과 참으로 거리가 있고 이것이 우리에게 하루하루의 아쉬움이 된다. 왜 그렇게 내 주변엔 인물이 없는가는 해결되지 않는 난제다.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면 내 팔자의 박복함을 한탄하게된다. 멘토라는 선험자의 검색도 포기하고 바쁜 일상을 보내게된다. 그러다 나를 바라보는 청춘 세대를 볼 나이가 되었다. 윗세대에 바라고 요구하는 세대에서 들어주고 받아주는 세대의 전환점에 있다.

 여전히 나의 업무 구도자와 인생의 구도자는 볼 수가 없다. 인생 독고다이인지 고독한 인생인지 알 수 없는데 나를 바라보는 눈망울을 바라본다. 나를 외면하던 사람들과 똑같은 길을 걸을 것이가는 큰 고민이다. 내 생각의 총체적 합이 자꾸 나에게 묻는다. 그 이유와 왜 이런 마음이 들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가장 정확한 가슴의 저울의 알림도 외면하기 어렵다.

 이 과정에서 나는 알 수 없는 고민과 심적 복잡함을 안고 간접적인 해결책의 갈구와 일부 실행을 통한 경험을 해왔다. 그 속에서 나는 멘토란 찾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부족한 상태에서 부족한 안목으로 바라본 것이란 그저 내가 바라는 것을 그리는 내 마음의 다른 모습과 희망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됀다. 이것을 아는 것도 큰 공부다.

 반면 내가 끊임없이 공부하고 수준, 안목, 품격을 적립해가다보면 이를 보고 찾아오는 수준 높은 사람들을 만나게된다. 진정한 멘토의 가능성을 갖은 사람과 상호작용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이 아주 대단하다고 보기 어렵다. 일관성있게 바람직한 것을 꾸준히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과감하게 멘토라는 프레이밍과 환상을 깨버리는 정신이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멘토라는 프레임과 환상속에 있는 순간 나약함과 보호받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강인할 수 있는 자질이 있다. 왜 스스로 무릎꿇고 구원을 원하는가? 조금 스스로가 바보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는 자만심이 아니라 좀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일 뿐이다. 그렇다고 나를 생각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인간 세상에서 협력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타인에게 즐거움과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 위한 다짐이다.

 내 스스로 일정 분야를 갈고 닦아서 누군가에게 질문보다는 제안을 하고, 누군가에게 부탁하기보다 베풀어주며 내 삶과 타인들의 삶에 잠시 조그만 공헌을 한다면 그 삶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멘토를 찾는 아까운 시간은 어쩌면 짧은 시간의 만족과 희망을 파는 멋진 상술일 때도 있다. 지속성을 통한  성취는 오롯히 본인에게 달렸다.

 차라리 그 시간에 내가 지향하는 분야의 전문가가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낫다. 아니 스스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멘토가 되려는 도전이 필요하다. 그런 도전이 어렵게 희망을 쫒아가는 고문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이 희망고문을 박차고 나가다보면 당신을 찾는 꽤 괜찮은 사람들이 당신들의 주위에 남게된다. 일방적으로 기대고 받는 대상은 내 곁에 오래 남지 않기 때문이다.

 마케팅적 관점에서도 좋은 제품은 그 수준에 맞춰 이 제품을 돋보이게하는 다른 제품들과 새로운 시장을 만든다. 흡입력있는 pull marketing은 사람에게도 유효하다.

 저렴하고 형편없는 제품에는 마케팅을 한다는 것이 잘 못된 표현이다. 여기는 수선이 정답이다.  제품도 삶도 마찬가지다. 수선없이 밀어내기식으로 저렴함을 추구한다면 제품을 밀다가 결국 내 삶에서 나를 밀어내게된다.

 그래서 청춘이라면 더욱더 멘토에 대한 기대보다 어떤 멘토가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된다. 이것이 본인의 정체성을 만들어 준다. 중년의 발걸음속에서 쌓아온 수준이 낮다보면 인생의 트랙을 이탈하는 사람들이 있다. 따뜻한 위로와 지원을 하지만 대부분 자신에게서 그 문제가 시작된다. 무사안일하게 돌아가는 삶은 환상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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