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이 Nov 02. 2018

일단, 시작

 4년째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 벼리와 나의 만남은 느닷없이 시작되었다. 길고양이에게 어느 날 갑작기게 집사로 간택당한 것은 아니다. 2페이지짜리 입양 신청서를 작성하고 사료와 화장실 모래 같은 용품을 미리 구매하는 등 사진 속에서만 보던 아기 고양이를 내 품에 안아 보기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에 고양이가 갑작스레 들이닥쳤다고 말하는 이유는 내가 깊이 고민하지 않고 고양이와의 인연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입양을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했어야 할, 내가 어느 생명을 온전히 책임질 준비가 되었는지 여부에 대해서 충분히 숙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름 신중한다고 했건만, 아니었다. 처음 만난 내 품에서 벌벌 떨고만 있는 아기 고양이를 안아 들자마자 깨달았다.


'나는 아직 이 아이와의 인연을 시작할 준비가 되지 않았어. 큰일 났다.'

 

 나는 내 인생과 이 고양이의 묘생에서 매우 중요한 결정을, 그러니까 앞으로 둘 중 하나 - 아마도, 그리고 바라건대 내가 끝까지 책임질 수 있도록 내가 아닌 나의 작은 고양이 - 가 죽을 때까지 모든 시간을 함께 하겠다는 결정을 너무도 쉽게 내렸던 것이다. 그렇게 미처 마음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고양이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처음 사진으로 만났던 아깽이(좌)가 지금은 의젓하면서 여전히 침대보다 택배박스를 좋아하는 성묘(우)가 되었다.



 얄팍한 고민만으로 시작한 고양이와의 동거는 역시나 녹록지 않다.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무엇보다 수년 뒤에 겪어야 할 이별과 상실을 매일 생각하게 되는 게 가장 괴롭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한때나마 행복했다가 슬퍼지는 것보다는 그저 평생 행복하지 않은 것을 선택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국 별생각 없이, 일단은 무작정 고양이와 살기 시작한 덕분에 나는 지금 행복한 셈이다.

출처: pickacat

 생각해보니, 큰 고민 없이 시작한 일들은 웬만하면 좋은 결과를 낳았다. 돌이켜보면 사소한 우연에 불과했는데 인연이라고 착각하고서 만나기 시작했던 그 사람도, 무작정 한국에서 달아나서 한동안 지내기로 했던 그 도시도, 어쨌거나 좋고 좋았다. 물론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인연들이지만, 깊이 고민하지 않고 일단 시작한 덕분에 조금이라도 행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번에 참여하게 된, <11월 한 달 동안 매일 글쓰기> 프로젝트 역시 별생각 없이 시작했으며, 역시나 내가 너무 깊이 고민하지 않고 일을 벌였다는 사실을 시작하자마자 깨달았다. 오늘 퇴근 후에 고양이에게 뽀뽀를 10번도 하지 못했는데 벌써 잘 시간을 훌쩍 넘겼고, 7주 동안 본방 사수해온 드라마의 최종화도 놓쳤으며, 그 와중에도 마음에 드는 글은 쓰지도 못했다. 하지만 또다시 이렇게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서 시작한 덕분에 누릴 즐거움이 있으리라 믿는다. 적어도 일상 사이로 새어나가던 시간들을 여기, 한 글자 한 글자 위에 얇게라도 쌓아둘 수는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일단은 이렇게 시작하고 볼 일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