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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이 Dec 28. 2017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사료 값 벌기 위해서 일한다던 나의 집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내가 지금의 집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4년차 직장인이었다. 나름 대학 시절 전공을 살리겠다고 골라간 인더스트리 및 기업이었음에도 그녀는 일에서 보람을 찾지 못하겠다며 늘 울상이었다. 특히 새벽까지 야근하고 들어온 날이면 나를 붙잡고서 "더럽고 힘들어도 어떡해, 그래도 엄마가 일하니까 사료도 사고 간식도 사고 장난감도 사지..."라고 중얼거리고는 했다. 그럴 때는 집사가 안쓰러워서 내 포근한 배에 코를 파묻고 부비부비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기도 했더랬다. 여하간 집사가 사다 바치는 산해진미와 반짝이는 장난감에 신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깨어있는 시간 중 절반 이상을 쓰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니 내가 괜히 아쉬웠다. 아무리 다 누리면서 살기 힘든 닝겐의 삶이라지만 - 물론 우리 냥이 세계에서도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 부지런한 집사는 유용하지만 가끔 귀찮게 굴고, 태평한 집사는 편하지만 가끔 답답하다. -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일에서 보람이나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말이다.


집사는 학위논문 쓸 때 내가 옆에 있어서 힘이 됐다고 해서 흐뭇했다. 집사의 가방끈 늘리는 데 내가 일조했군.


 이렇게 집사를 생각해주는 내 마음을 알아챈 건지 결국 집사는 퇴사 후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난 2년 동안 새로운 레퍼토리로 내 옆에서 우는 소리를 하고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논문을 쓰던 집사는 다시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일에서 보람을 기대하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역시 안정적으로, 큰 스트레스 받지 않고 우리 냥님 사료 값 벌 수 있는 회사가 최고인 걸까? 몇 년째 답을 내리지 못하고 똑같은 문제를 맴도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일본의 정신과 의사인 이즈미야 간지(泉谷閑示)가 쓴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를 읽기 시작했다.  




 지른 것 같은(?) 제목에서 받은 첫 인상과는 달리 내용이 탄탄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먼저 '현상 기술-원인 분석-대안 제시'와 같은 논리적인 흐름을 토대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저자 본인의 생각만을 기술한 게 아니라 일본 지식인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는 물론이고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나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와 같은 철학자들의 논의도 끌어와서 논거로 삼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먼저 저자가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 갖게 된 문제 의식부터 이야기해보겠다. 그에 따르면 최근 들어 일본에서는 우울증 환자들이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늘어났는데, 저자는 그 원인을 직원을 대체가능한 소모품으로 삼는 기업 조직의 본질이나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 과도해진 노동 착취 현상보다는  '일(work)'과 '노동(labor)'의 구분이 불분명해졌다는 데서 찾는다. 본래 임금노동은 말 그대로 돈을 벌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었고 일은 흔히 '천직(calling)'이라고 불리는, 가치 혹은 보람이 부여된 활동이었는데 근대를 지나면서 일과 노동의 개념이 혼합되면서 실제 하는 것(=노동)과 인간이 기대하는 바(=일) 사이에 괴리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열심히 일하는 그대 닝겐들이 불행한 이유는 "소비되어 소모되고 마는 노동의 생산물과 어느 정도 영속성을 지니고 세상을 만들어내는 인간적인 일의 질적인 차이"(88쪽, 강조는 냥님)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 책의 설명이다. 나의 집사를 포함하여 현대인들은 보람과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일(work)을 하는 것, 그러니까 자아 실현을 노동과 직업을 통해서 찾으려 하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마다, 혹은 일요일 저녁마다 절망하고 불행해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진정한 자아가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바깥쪽에 갖춰져 있고, 그래서 이미 사회에 마련된 '직업'과 연결함으로써 자아가 실현된다는 사고방식은 확실히 사람들을 끝없는 '자아찾기', 즉 '일(labor)찾기'의 미로로 몰아넣고 있다.(136쪽)



 그렇다면 저자가 제시하는 해결법은 무엇인가? 그저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도구인 '노동'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삶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불행하게 된 나의 집사는 어떻게 해야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저자가 제시하는 방법은 진짜 제목 그대로다. 생계를 위해서 하는 일(노동) 따위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말라는 것이다. 즉, "일하는 데 중점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137쪽)고 말한다. 뭐, 이건 집사가 직장인일 때 자주 말했던 것이고, 집사가 다시 공부하는 동안 계속 일하면서 연차를 쌓아온 집사의 친구들도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삶의 보람과 가치는 어디에서 찾는가? 이 지점에서 저자는 니체를 끌어온다.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그 어떤 목적도 없이 창조와 파괴 자체를 즐기는 놀이 혹은 유희(play)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삶에 대한 주인 의식 없이, 그러니까 그냥 생각 없이 사는 '낙타'의 삶과 외부에서 주어진 기준에 맞추어 치열하게 사는 '사자'의 삶과 그리고 그 어떤 목적에도 인생을 바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아이'의 삶을 저자는 추천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우리 집에 놀러온 집사 친구들 중 한 닝겐은 일은 그냥 밥벌이니까 취미생활 바깥에 있는 노동의 영역에서는 보람도 영혼도 기대하지 말자고 말한 적 있는데, 그 닝겐의 말도 저자가 제안하는 삶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해답이 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나도 안다. 하지만 여전히 석연치 않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그래도 닝겐들은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절반 넘는 시간 동안 일하면서 보내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일에서 의미를 포기할 수 있는가? 여러 형태를 시도하여 노동=일 혹은 노동의 일부에 일이 포함되도록 노력이라도 해봐야지, 그렇지 않고 포기하기에는 인생이 짧고 너네의 노동시간은 너무 길다.  



 그렇다고 이 책이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과 노동의 차이와 일/노동에 대한 현대인의 심리 구조를 차근차근 설명해준 것이나 니체가 말한 '아이'의 삶과 예술의 가치를 강조한 것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더불어서 책 내용 중 일부는 '일 따위'에서 삶의 보람을 어떻게 기대해볼 수 있을지에 대한 단서를 던져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은 문장이 그러하다.

(...) 그러므로 오늘의 합목적적 사고에 치우친 심적 상태에는 '놀이'가 파고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다. 그래서 인생 자체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수 있는 '의의'를 훈장처럼 모으기만 할 뿐 정작 중요한 '의미'는 느낄 수 없는 공허함으로 가득 차는 것이 아닐까.(196쪽)


 저자는 외부에서 형성된 기준인 '의의'와 일하는 개인 주체가 스스로 형성한 '의미'를 구분하고 있다. 비록 남이 보기에 별로 가치가 없는 일일지라도 본인이 납득할 수 있는 의미를 형성하여 그 일에 부여할 수 있다면 '일 따위'에서도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그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도 참으로 녹록치 않다는 것을 나도 안다.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어도 이런저런 이유들 때문에 와장창 그 마음이 무너질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인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무너진 것을 쌓고 쌓으면서 가는 여정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러니 힘내라 집사야, 정히 마음자리가 어지러운 날에는 나님이 곁에 있어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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