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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이 Jan 03. 2018

소멸세계

연애와 결혼이 귀찮은 나의 집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나의 집사는 지금 싱글이다. 작년에도 싱글이었다. 나와 처음 만난 재작년에도 싱글이었다. 나와 만나기 전에도 이미 싱글 2년 차였다! 

 집사는 자기가 이토록 오랜 기간 싱글인 것은 이토록 사랑스러운 나 때문에 남자 만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라며 내 탓을 한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이다. 그렇지만 나의 집사가 닝겐계에서 매력적인지 아닌지는 차치하더라도 옆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집사는 굳이 싱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집사는 자신이 연애 관계와 사랑에 수반되기 마련인 감정의 '소용돌이'를 잘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구태여 그 소용돌이 안으로 걸어들어가려고 애쓰지 않는다. 소용돌이가 좋은 감정으로 이루어진 것이건 나쁜 감정으로 이루어진 것이건 말이다. 그녀는 실망, 질투, 서운함 등과 같은 나쁜 감정으로 휘감긴 생활을 싫어하는 것은 물론이고 설렘, 기쁨, 행복, 충족 등과 같은 좋은 감정으로 벅차더라도 그 모든 게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금세 시무룩해진다. 닝겐계 만사에 적용되는 신통방통한 어구인 'High risk, high return'를 새겨듣고서 집사는 인간관계에서도 'low risk, low return' 기조로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low return'의 레벨을 나 냥님이 'mid return' 정도로 상승시켜줌에 따라 집사가 현재의 기조를 앞으로도 유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렇지만 내가 떠난다면? 분명 나와 집사의 시간은 달라서 집사 혼자 남겨질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닝겐의 삶도 단 한 번뿐인데, 그래도 나는 내 집사가 high return을 누렸으면 좋겠다. 공허하지만 고요한 마음 정도에 만족하려는 집사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은 바로 일본의 소설가 무라타 사야카(村田沙耶香)의 <소멸세계>다. 무라타 사야카는 15년 넘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자신의 경험을 녹여낸 <편의점 인간>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소멸세계>는 <편의점 인간>보다는 현실에다가 상상력을 더 많이 덧댄 설정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더 흥미로웠다.  


 <소멸세계>의 배경은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시술로만 출산이 이루어지며, 섹스와 사랑이 세상에서 사라진 근미래다. 거의 모든 출산이 인공수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소설 속 기술은 인공자궁을 가진 남성이 출산을 하는 수준에 이른다. 그러자 번식을 위한 섹스는 사라지게 된다. 남녀가 성관계를 통해 출산하는 것은 책에서나 보던 일("교미로 출산을 하던 때가 있었다며?")이 된 것이다. 대신 사랑 중에서도 감정적 차원은 성관계가 불가능한 대상들, 그러니까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과 같은 가상의 존재들과만 나누게 되고, 육체적 차원은 '성욕'으로만 치부되어 특정 구역에서 효율적으로 처리될 뿐이다. 

  또한 사랑해서 낳은, 고유명사를 가진 '우리 자식'들이 사라지고, 사회 전체가 인간 개체 수를 조정하면서 과학기술로 낳은 대명사로서의 '아기'(소설 속에서 모든 아기들은 이름 없이 '아가'라고 불린다.)만 출산되고 공동 양육된다. 


기술 발전이 생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Rachel Lee Hovnanian의 3D 프린팅 작업 <Perfect Baby Showroom>

 

 이렇듯 점차 섹스의 사회적 효용(출산을 통한 사회 유지)이 사라지게 되자 개인적 효용도 부정 당하게 된다. 그리고 몸이 얽히고 마음이 얽히는 데서 오는 감정 에너지 소모, 그러니까 사랑해서 생기는 분노, 슬픔, 무기력감, 절망 같은 어두운 면은 세상에서 점차 추방 당하게 된다. 이다지도 클린-한 세상이라니. <소멸세계>에서는 마음에 티끌이 다 소멸된다. 슬픔도 눈물도 고통도 모두 사라진다. 고요하다. 그리고 공허하다.  




 하지만 주인공 아마네는 밝고 맑지만 얕디 얕은 세상과 더럽고 질척이지만 깊고 충만한 감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아마네는 세상 사람들처럼 사랑 없이 편안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지키고 싶어한다. 동시에 자신의 심장에 피가 흐르고 살갗이 뜨거운 인간임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감정인 사랑과 그 감정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섹스를 포기할 수 없다는 본능을 떨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인간과 하는 섹스가 행복하다는 느낌을 온전하게 경험하지도 못한다. 그녀가 관계를 맺는 남자들 중 누구도 그녀의 마음과 몸에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딴 게 잘되겠어? 가족이 없는 상태에서 아이만 태어나는 세상이 잘 돌아가겠느냐고. 그리고 아이가 있든 없든, '나와 인생이 얽혀 있는 사람'이 인간에게는 필요해. 우리 몸과 마음은 그런 걸 필요로 하게끔 만들어져 있어. 그러니까 다들 그런 세상에선 도망쳐 나올 거야. 가족이 필요해, 외로워서 죽을 것 같아 하면서."
(150쪽)  


 그러나 아마네가 자신의 인생과 영원히 얽혀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 여겼던 남편마저 세계 최초로 인공 자궁을 이식 받은 남성으로서 소멸세계의 일원이 되면서 아마네 역시 슬픔도 행복도 없는 클린한 세계에 젖어간다. 


 이곳에 온 뒤로 나는 한 번도 새로운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사랑이 없으면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늘 영혼을 질질 끌고 다니는 기분이었는데. 
나는 인간이 아닌 존재와도 사랑하지 못하게 된 걸까. 성욕은 사랑의 달콤한 산물이 아니라 어느새 몸속에 쌓여 아랫배에서 들끓는 불쾌한 배설물로 변해 있었다. 그토록 숭고했던 내 성욕이 하잘것없고 거추장스러운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나는 열에 달뜬 몸을 추스르고 청결한 방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나는 이 세상의 형태에 너무나 딱 들어맞았다. (250쪽) 


 사랑과 섹스가 사라진 세계에서 여전히 사랑해서 하는 섹스를 갈구하던 아마네는 멸종 위기에 처한 존재인 셈이다. 영혼이 탈색되어 가는 것 같던 아마네가 폭주하면서 소설이 마무리된다. 


  



 사회적 요구(효율적인 생식 및 번식에 대한 필요)가 개개인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소멸세계>가 제시하는 디스토피아는 매우 흥미롭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한국에서도 '인구 절벽'이 곧 현실화될 것이라고 하니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감정과 관계에 있어서도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경제적인 태도가 강하게 개입하는 '쿨'한 태도나 '썸'이니 하는 요즘의 현상에 대한 냉소가 담긴 우화처럼 읽어보아도 좋을 듯 싶다.  


 

 그렇지만 내가 집사에게 이 소설을 추천하는 이유는 아마네의 복잡한 심경, 그러니까 상처 받지 않는 안전한 애정만 누리고 싶기도 하고,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유대와 생의 감각을 버릴 수 없는 이중적인 감정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잃지도 얻지도 않고 살 것이냐, 잃고 얻고 잃고 얻어가면서 살 것이냐. 객관적인 정답은 없고 그저 개개인의 성향과 선택에 달린 최선의 답만 있을 뿐이라는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더 사랑하면 손해래."라느니 "사랑해서 결혼하면 서로 힘들어요. 그냥 조건 맞춰서 하는 게 제일 나음." 운운하는 남들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이느라 집사가 미리 마음을 닫아 두지는 말았으면 한다. 그리고 슬펐던 기억을 잊기보다는 자양분으로 삼고 행복했던 기억은 기억 그 자체로 고이 간직할 줄 아는 마음의 근육을 키우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너무 힘들고 괴로운 날에는 내가 옆에 있어 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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