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지어함박눈 May 20. 2020

엄마표 닭볶음탕이 싱거웠던 날

스위스, 인터라켄

파리에서의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스위스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물가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스위스를 그것도 춥디 추운 한겨울에 가게 된 이유는 온전히 '스위스 가보고 싶다'는 엄마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날씨는 하루를 제외하곤 모두 무난&좋은 편이었고,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던 마테호른의 완전한 모습도 목격했다. 굳이 애쓰지 않았는데도 톱니바퀴 물려가듯 타이밍이 맞아떨어지는 행운의 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마테호른에서 꼭 찍어야한다는 토블론(초콜렛) 인증샷!

스위스의 물가에 놀란 우리 모녀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내일 점심은 뭘 먹을까 고민하던 중에 배낭 속 고추장과 좀 전에 다녀온 마트에서 우연히 보게 된 생닭이 생각난 나는 냉큼 엄마 침대로 달려가 말했다.


엄마! 내일 점심에 닭볶음탕해줘!
내가 만든 요리(?)들

세계여행 중에는 식비를 아끼기 위해서 요. 알. 못인 나였지만 나름 입맛대로 요리를 해 먹었다. 밥을 지을 땐 진 밥 또는 탄 밥이 되곤 했는데 그것도 시간이 지나다 보니 능숙해져서 10~15분이면 냄비밥을 뚝딱 만들어내곤 했다. 맞춤형 한국식 식생활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여행한 지 3개월이 돼가는 즈음인데도 그다지 한식이 끌리진 않았다.


하지만 엄마표 음식들은 달랐다.
엄마가 해준 요리가 역시 최고 ..!

누군들 맛이 없겠냐만은 (자랑을 좀 하자면) 우리 엄마는 전라도 광주 출신에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소유하고 계신 그야말로 한식의 대가 같은 분이었다. 밖에 눈이 펑펑하고 내리는 12월에 엄마표 닭볶음탕은 스위스에서 먹기 딱 좋은 음식이었기에 엄마와 함께 장을 봐왔다. 나는 밥을 짓고 엄마는 닭볶음탕을 만들기로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술을 부린 것처럼 눈 깜짝할 새에 먹음직스러운 닭볶음탕이 완성됐다. 그런데 닭볶음탕의 맛이 평소와는 달랐다.


나 : 엄마, 닭볶음탕 간이 전혀 안되어있는 거 같은데?

엄마 : 그래? 엄마는 모르겠는데.


이때 눈치를 챘었어야 했는데.. 그날 밤부터 엄마는 감기에 시달리셨다.


그간 시차 적응 탓이라고만 생각했던 엄마의 피로감은 사실 급격히 낮아진 온도 탓에 걸려버린 감기 때문이었다. 파리에서부터 완벽한 여행은 내려두었던 나였기에 엄마의 컨디션이 중요했지만 엄마는 그게 아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보고 싶다고 이야기하셨던 스위스라서 그런지 엄마는 숙소에만 있으면서도 창밖을 자꾸 바라보셨다.


우리 세 자매 중 나를 막내이자 늦둥이로 낳으셨던 엄마는 학부모 모임에선 항상 '왕'언니의 역할을 맡곤 했다. 친구들의 엄마보다 많게는 위로 10살 이상 차이가 났던 우리 엄마였지만 사실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연륜에서 나오는 엄마 특유의 지혜로움이 더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의 엄마는 환갑을 넘기신 나이가 되었다. 감기에 걸린 엄마가 "이제는 유럽같이 먼 나라까지는 못 오겠다"라는 말을 듣었을 때 엄마의 나이가 나에게 무척이나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이제야 사회에서 한 명분의 몫을 할 수 있는 내가 되었기에 제대로 된 효도를 해드리고 싶었는데, 나의 시간만큼 엄마의 시간도 흐르고 있다는 게 정말로 야속했다.


난 가끔 엄마에게 '이왕 사는 거 손녀의 손녀의 손녀의 결혼식까지 봐야지!'라고 한다. 그럼 엄마는 차라리 욕을 하라면서 '하하호호'하고 웃으신다. 장난 삼아한 말이지만 사실 약간의 진담도 섞인 말이다. 내가 나이를 먹어가는 것처럼 부모님도 나이를 먹어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섭리라지만 적어도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특히나 여행을 할 때에는 내게 시간을 다루는 초능력이 있어서 시간을 되돌리고 싶기도, 멈추고 싶기도 하다.

열차안에서 만난 너무 귀여웠던 크리스마스 트리 :)

어쨌거나 이렇게 터무니없는 생각을 할 정도로 나는 엄마가 너무 좋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엄마는 또다시 '차라리 욕을 해'라며 웃어넘기실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엄마가 아프지 않은 선에서 건강하게, 정말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이건 딸로서 평생 내려놓지 못할 욕심일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달이 질 때까지 기다리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