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해 씨는 이래서 산으로 간다 001, 지리산
산에서 찾은 백신
산을 오르기 전 나는 나만의 의식을 치른다. 산 정상 쪽을 바라보며 합장을 하고 기도를 올리는 것과 산의 기운을 읽는 것이다.
몇 해 전에 암벽 산을 오를 때였다. 앞서가던 친구가 줄을 잡고 오르려던 순간 줄이 끊어져 버렸다. 주변에 있던 우리는 너무 놀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때 산꾼들이 했던 말을 정확히 기억한다.
‘산은 함부로 오르는 게 아니다, 산신이 허락을 해줘야 한다.’
낡은 이야기 같았지만, 그 사건을 겪은 후에는 그냥 산을 오를 수 없었다. 또 하나는 산의 기운을 읽는 것인데 산을 마주하고 있으면 유난히 편안함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그날 산행은 잘 된다. 나만이 느끼는 기운이라 설명하기 힘들지만, 산에서 일어나는 사고를 많이 접했던 터라 조심하려는 심리가 적용된 거라 말할 수 있다.
오늘은 해발 1900m가 넘는 지리산 천왕봉을 올라야 한다. 새벽 4시 30분에 출발하여 함양 백무동까지 오니 2시간이 걸렸다. 아직 동이 트기 직전이라 그런지 주변이 어둡고 음습하다. 안개가 낀 것 같기도 하고 비가 올 것도 같다. 일기예보를 살폈지만, 비 소식은 없었다. 입구부터 산 곳곳에 곰을 조심하라는 안내문도 있어서 불길했다.
<지리산 중턱에서 바로 본 전경>
시작점은 해발 500m 였다. 첫발을 뗐는데 돌산이다. 무등산처럼 증심사 입구에서 바람재까지 완만한 경사를 생각했는데 아니다. 산행 예상 시간이 10시간이 넘다 보니 돌산부터 오르는 것은 심리적 부담이 크다. 산을 오를 때 가끔 ‘깔끄막’(급경사)부터 시작되는 산이 있다. 능선부터 시작하여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지리산도 그렇다. 지리산이야 워낙 험한 산으로 유명하지만, 예전에 둘레길에서 느꼈던 편안함이 없이 바로 실전에 돌입했다.
산을 오르면 제일 먼저 일행들의 안부를 묻는다.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밀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러다 앞서가는 사람과 뒤서는 사람이 생긴다. 자기의 속도에 맞게 올라가다 보니 순서가 생기는 거다. 그러다가 점점 산행 시간이 걸어지면 수다보다는 침묵의 시간이 길어진다. 각자 거리도 멀어지는데 그렇다고 해서 뒤를 돌아보거나 초조해지지 않는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알고 있으므로 뒤처져도 앞만 보고 걸으면 되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기로 한 장터목 대피소에서 다시 일행과 합류했다. 각자 싸 온 도시락을 꺼내 먹으며 한숨을 돌렸다. 일행이 아닌 낯선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랑 왔는지 물었다. 나는 일행들을 소개하며 소소한 것들을 주고받았다. 노인은 아내와 내 또래의 딸과 함께 왔다고 소개했다. 지리산 근처에 살아서 그런지 우리가 오르려는 코스를 보더니 다음에는 다른 쪽으로 가보라며 권했다.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가족을 동반하고 산에 오르는 사람이라 그런지 믿음이 갔다. 이상하게도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동질감이 생긴다.
노인 일행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올랐다. 장터목 대피소에서 천왕봉까지 아직 1시간 30분이나 2시간은 더 가야 한다. 서둘러야 했다. 아무리 여름이지만 내려오는 시간도 생각해야 한다.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구름과 가까워졌다. 고도가 높은 산은 바람과 구름이 다르다. 한여름인데도 차가운 기운을 뿜고 있다. 바람에 날이 서 있다. 바람에도 위엄이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준다. 바람을 한 모금 마시면 속엣것들이 다 후련해지는 느낌이다. 구름은 민낯을 그대로 보여줬다. 산 밑에서 느끼지 못했던 구름의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볼 수 있다. 손만 대면 구름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출발한 지 6시간 만에 정상인 천왕봉에 올랐다. 인증 사진을 찍기 위해 비석 앞에 줄을 섰다. 먼저 올라간 일행들도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만 찍고 바로 옆으로 비켜섰다. 정상에 올랐던 기쁨은 잠시뿐이다. 산을 싫어하는 지인은 산을 오르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올라갔다 그냥 내려올 걸 뭐하러 올라가냐며 타박했다. 하지만 짧은 순간이지만 정상에 서 본 사람은 그 맛을 안다. 힘들지만 목표를 이루었다는 뿌듯함이 밀려온다. 그건 그 순간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스며든다. 어떤 일을 할 때 좀 더 적극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거나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견디는 힘이 되기도 한다.
<지리산 천왕봉>
정상에서 느끼는 감정을 뒤로하고 다시 하산했다. 차를 주차한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왔던 길로 회귀해야 했다. 내려가는 시간은 오르는 시간보다 발걸음이 빠르다는 걸 감안하다고 해도 다시 5시간이나 6시간을 내려가야 했다. 말이 6시간이지 정말 기나긴 시간이다.
내려오는 길은 지루한 반복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 반복의 끝 지점인 마지막 발걸음을 확인할 때는 시작할 때와 똑같이 산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일행들이 다치지 않고 무사히 산행하게 되어서 감사하다는 뜻이다. 어둑해질 때 산을 올랐는데 내려왔더니 다시 어둑해졌다. 오늘 총 산행 시간은 13시간. 물론 중간에 점심을 먹는다거나 쉬는 시간까지 포함된 시간이다.
발가락은 아프지만 내 발걸음의 속도와 마음의 방향을 알고 산을 오르면 탈이 나는 경우는 적다. 사람들은 산을 오르면서 경험했던 것을 인생에 비유한다. 나도 그렇다.
남들처럼 빨리 가고 싶지만 내 속도의 한계를 느끼고 인정하면 조급하지 않다. 늦지만 정상을 향해 가는 발걸음처럼 일정한 속도에 맞게 살 수 있다. 또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등산 코스를 생각한다. 지루한 반복의 시간을 견뎌야 산행의 종착점인 처음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
한 번씩 이렇게 높은 산을 오르고 나면 1년 치의 겸손함과 힘든 시간을 견뎌서 목표를 이뤘다는 성취감으로 마음의 백신이 생긴다. 사람들 틈에서 생기는 불안과 불신들도 희석된다. 내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산을 자주 오르는 까닭은 고요한 몰입 속에만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의 백신을 찾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