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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석 Nov 15. 2017

#5 수원화성_정조의 꿈-1

효(孝)로 이룬 성(城)

수원화성을 처음 찾은 건 5년 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겨울의 초입이었다.

추운 날 어린 딸을 데리고 왜 그곳에 가고 싶었는지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곳을 다녀간 후 내 삶의 큰 전환점이 된 여행이었다는 것이다.

수원화성에 대한 사전 지식 하나 없이 무작정 떠났기에 기대와 설렘은 그다지 크지 않았었다.

날이 추워서 인지 길거리는 한산했고 조용했다.

단체로 이동 중인 중국인 관광객들만 더러 보일 뿐이었다.

어디서부터 봐야 하는지 계획조차 없었고 관광안내서 하나를 집어 들고서야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지도를 살피니 추운 날 딸과 함께 하루에 다 돌아보기엔 조금 벅찰 수 있겠다고 판단되었다.

욕심내지 말고 먼저 화성을 둘러보고, 다음에 다시 찾아와 행궁을 볼 계획을 세웠다.

수원화성 지도

상점들이 밀집된 거리를 걷다 어느 작은 화랑 쇼윈도에 걸린 그림 하나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펜으로 그린 방화수류정이었다. A4 정도의 작은 그림이었지만 내가 받은 끌림은 컸다.

더 자세히 보고 싶어 화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부엔 더 놀랄 수밖에 없는 그림들이 벽면에 가득 걸려 있었다.

수원화성을 펜으로 그려낸 펜화들이었다.

화랑 주인에게 화가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더니 김영택 화백이라고 일러주었다.

펜으로 어쩜 저렇게 섬세하게 표현이 가능한 것인지 놀라웠다.

난 이때 한국문화유산 스케치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멘토의 대상이 될만한 그림들이 필요해서 어반 스케치 관련 책들을 수집 중이었는데 유독 한국의 문화유산을 그린 스케치 책들은 찾을 수가 없었다.

화가의 이름을 메모해 두었다가 검색해 보았고 이 작가분이  낸 책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김영택의 펜화 기행,  펜으로 읽는 한국 문화유산(이미지 참조)


책의 그림들도 훌륭하지만 실물로 보았던 그림의 느낌이 개인적으로는 더 좋았다.

책 속에는 화랑에서 보았던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가끔 인사동의 화랑이나 큰 식당에 걸려있는 작가의 그림을 발견할 때면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지금껏 내 멘토로서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경지까지 가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선망의 대상이 있다는 것 자체로 나는 행복하다.

수원화성은 나에게 특별한 기회와 동기부여를 제공해준 곳이다. 그래서 이곳이 좋다.


수원화성 축조의 배경

18세기 조선은 큰 변화의 물결이 일렁이던 시기였다.

상업이 발달하며 한양을 비롯한 전국 각지로 시장이 확대되고 있었다.

한양은 전국 시장 경제의 중심점이었다.

종로, 동대문, 남대문의 3대 시장이 형성되며 한양으로의 인구 유입이 급속하게 늘고 있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사회 모순들에 대한 대응책을 찾으며 실학의 중요성이 대두되던 시기였다.

상업의 번성은 농업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양반 중심 사회의 근간을 헤칠 수 있다 하여 경계해 왔었다.

실학자들은 상업 부흥의 필연성과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 변화를 주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포화상태가 된 도심 상권을 분산시키며 상업 기능에 충실한 도시의 건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신도시  예상지로 여러 지역이 물망에 올랐으나 한양에서 삼남을 잊던 교통의 요점지인 수원이 유력지로 거론되었다고 한다.

수원의 신도시 계획은 상업을 부흥시키기 위한 정책적인 이유도 있지만 정조의 정치적 의도도 반영되었다고 한다. 

정조는 열한 살의 나이에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경험했다.

당파싸움으로 희생된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고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계획을 천천히 실행해 나갔다.

신도시의 경제 활성화는 도심 권력 세력의 힘을 분산시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목적에서였다.

무엇보다 신도시 건설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사도세자의 무덤(현륭원)을 옮기는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철저한 준비와 계획하에 진행되었다.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계획안을 만들고 당시 좌의정이었던 채제공이 공사 총괄 책임자로 임명되며 공사는 시작되었다.

공사기간은 초기 10년을 예상하였지만 2년 9개월 만에 공사를 마무리 지으며 시간을 단축시켰다.

공사기간이 단축된 이유는 원활한 자금 조달과 철저한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하였고, 다산 정약용이 고안한 다양한 기계장비(거중기, 유형거, 녹로 등)도 한몫을 했다.

화성의 축성 과정은 ‘화성성의궤’에 모두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의궤에는 모든 계획과 설계, 공사 비용의 수입과 지출, 각 건물 별 자재 수량 및 규격, 공사 종사자의 임금과 작업일 수 등을 세세하게 기록하였다고 한다.

일제시대와 6.25 전쟁 때 파괴된 화성을 과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복원 가능했던 이유도 의궤의 치밀한 기록 때문이라고 한다.

수원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아름다움을 인정받은 우리의 문화재이다.


화성 성벽의 길이는 5.6Km, 높이는 6.2m로 축성되었다.

도시의 기본 골격은 조선 초기의 궁궐 배치를 기본으로 하되, 정면이 남향이 아닌 동향으로 바꾼 점이 특이하다. 이유는 한양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남북으로 굴곡 없이 놓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또한 한양에서 내려올 때 바로 북문(장안문)으로 진입이 가능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정면이 남향이 되면 동서로 길이 나기 때문에 이동의  번거로움으로 상업도시의 기능에 부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성문은 창용문(동), 화서문(서), 팔달문(남), 장한 문(북)의 4문을 두었고, 암문으로는 동안문, 서안문, 남안문, 북암문, 서남암문이 있다.


장안문 (長安門-북, 현무), 팔달문(八達門-남, 주작)

팔달문(남문)
장안문(북문)

이 두 문은 건축적 형태가 같다.

반원형으로 옹성을 두르고 중앙에 출입구가 나있다.

반원의 옹성은 벽돌로 쌓아 좌우 성벽의 돌과 대조를 이룬다.

옹성 출입구 위쪽에 다섯 개의 구멍이 나있는데 이를 오성지라 한다.

이는 성문에 화재 발생 시 다섯 개의 구멍에서 물이 나와 성문을 보호할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이며 우진각 지붕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화성에서 다포식 공포의 구조를 갖춘 건물은 장안문과 팔달문 이 두 곳뿐이다.

옹성 안에 서보면 적군이 성벽의 위엄에 기가 죽을 만큼 위협적인 느낌이 감돈다.


창룡문(蒼龍門-동, 청룡), 화서문(華西門-서, 백호)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창룡문


장안문, 팔달문보다는 규모가 작고 옹성의 형태도 흥인지문(동대문)처럼 한쪽으로 터진 반원형이다.

단층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 이익공 구조에 팔작지붕이다.

화성의 주집입로를 남북으로 계획한 것이기에 상대적으로 동서의 문은 출입 인원이 적었고 모 또한 축소시켰다.

개인적으로는 장안문과 팔달문보다 화서문이 더 맘에 들었다.

이국적인  느낌이 감도는 서북공심돈과 짝을 이루고 있어 안정감 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화홍문(華虹門)  : 수원화성의 꽃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수원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뽑으라면 단연 화홍문(북수문)이다. 

화성 축성 시 가장 먼저 시작된 작업은 성내를 가로지르는 물길을 정리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북쪽 광교산의 계곡물을 성내로 흘러 관통하며 남쪽 남수문으로 물길을 내는 것이었다.

기존의 물길이 있었으나 장마 때마다 범람하여 피해를 줄이고자 한 것이다.

북수문(화홍문)은 일곱 개의 아치형 수문을 내고 다리 위로 누각을 올렸다.

그중 가운데는 좌우의 홍예보다 약간 크게 하여 비례상 안정감을 주었다.

이 물길은 백성들의 휴식처이며 오염물을 배출하는 하수구 역할도 했다.

홍예를 통해 흘러나오는 물길의 모습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오른쪽 언덕 위에 있는 방화수류정은 성의 네 곳의 각루 중 하나로 가장 좋은 경관을 자랑하며 건축미 또한 훌륭한 곳이다.


이밖에도 서장대(팔달산 정상의 군사 지휘소)와 동장대(연무대-군사훈련장)가 있고 노대, 공심돈, 봉돈 등 아름다운 곳들이 많다.

                                          동장대(연무대)

                                          동북노대(좌)와 동북 공심돈(우)

정조는 강력한 군주가 되기를 바라며 화성을 완성시켰다.

그의 뜻대로 화성이 완성되자 사람들이 늘어나며 도시는 안정을 찾아갔다.

하지만 축성 이후 4년여 만에 정조는 갑자기 죽고 만다.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들이 있지만 그토록 원하고 꿈꾸었던 일들을 지켜보지 못한 채 원대한 꿈은 완성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수원으로 천도를 빨리 감행했다면 정조가 죽음을 맞이하진 않았을지도 모를 거란 상상을 해본다.

늘 역사는 아쉬움 속에 상상으로 남는가 보다.

정말 대단한 왕이라고 느껴지기에 단명으로 못 이룬 업적들은 더 컸을 거라 여겨진다.


정조의 꿈-2 , 화성행궁 다음 회에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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