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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석 Oct 24. 2017

#4 한양, 닫혀버린 문(門)

국보 1호, 보물 1호의 외로움

어린 시절 어머니는 옷을 사주기 위해 남대문 시장이나 동대문 시장으로 아들들을 데리고 자주 나오셨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곳에서 어머니를 놓칠세라 손을 꼭 잡고 따라다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두 시장을 가면 항상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지나쳐야 했다.

그 시절 어린이의 시선엔 문이 너무도 크고 웅장하게 느껴졌었다.

그 당시엔 가까이서 볼 수 없게 차도가 주변을 감고 있어서 자세히 볼 수도 없었고 진입도 불가능했다.

버스를 타고 옆을 지나갈 때면 차창에 기대어 구경하다가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돌려보곤 했다.

문은 사람이 지나가라고 만들었을 텐데 아무도 지나갈 수 없게 섬을 만들어 놓고 자동차와 사람들은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돌아다녔다.

지금은 복구를 하면서 시민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길 하나를 조성해 놓았지만 예전엔 일반인의 접근 자체가 안되었다.

어릴 적부터 보아온 문이라 그런지 늘 익숙하고 친숙하게 느껴졌다.

다른 문화유산은 몰라도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확실하게 알 정도로 각인되어 있었다.

항상 그 자리를 지키며 한결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어머니 같다.

지금도 이 곳을 지날 때면 어릴 적 추억이 아른거려 어머니의 정이 느껴진다.   

지금은 딸의 손을 잡고 이곳을 나온다.

문을 구경하러 오기고 하고 옷을 사주거나 맛있는 시장음식을 먹으러 오기도 한다.

딸이 성장하여 이곳에 왔을 때 아빠, 엄마가 생각날까?

미술용품점이 많아 혼자 자주 오는 편이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한양이 수도로 정해진 과정부터 간략하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조선 건국 초기에 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종묘, 사직, 궁궐을 건설하고 도성도 함께 조성하였다.  18.6km에 이르는 성터를 확정하고 전국 각지에서 차출된 엄청난 인원들을 투입하여 공사를 진행했다.

대부분 농번기인 겨울에 백성들과 승려들이 도성 축조에 동원되었는데 혹한의 겨울에 진행되다 보니 고된 노역과 동절기 공사로 인해 많은 인원이 희생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을 개국하며 숭유 억불정책에 따라 많은 승려들이 이곳에 강제로 투입되었다고 한다.

성곽은 조선 태조 때 축조를 시작으로 세종, 숙종 때 대규모의 개수축을 거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한양도성의 조성을 위해 음양오행의 원리를 적용하였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의 그림을 만들어 보았다. 

음양오행에 따른 한양 도성 개념도


한양도성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성문과 사이사이에 작은 4소문을 두었다.
4대 문은 유교 사상의 음양오행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근거를 두어 방위에 따라 동쪽에 인(仁)의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의(義)의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예(禮)의 '숭례문(崇禮門)', 그리고  북쪽에 지(智)의 '숙청문(肅淸門)'을 만들었다. 숙청문()은 원래 소지문(炤智門)으로 거론되다가 이름이 바뀌었고 지금은 숙정문()으로 불린다. 중앙에 신(信)인 보신각 (普信閣)을 두었다.
4 소문은 4대 문 사이에 있는 작은 성문들로 동북쪽에 '동소문=혜화문(惠化門)', 서남쪽에 '서소문=소덕문(昭德門)', 동남쪽에 '남소문='광희문(光熙門)', 서북쪽에 '북소문=창의문(彰義門)'을 두었다. 현재 돈의문(서대문)과 소의문(서소문)은 일제가 도로를 확장하며 헐어버려 멸실되어 사라졌다.

도성 안에 궁궐과 종묘사직, 4대 문과 4 소문을 완성하며 한양은 수도로서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숭례문(崇禮門)-남대문   

바지 지퍼가 열려있으면 ‘남대문 열렸어’라고 한다. ‘동대문 열렸어’라고 하지 않는다.

한양 도성의 4대 문 중 가장 크고 대표적인 문이라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아무렴 어떤가. 지퍼는 다시 잠그면 그만인 것을…..

숭례문(붓펜+피그먼드펜,브러쉬 마커 채색 ,320*240)


국보 제1호인 숭례문(崇禮門)은 한양 도성의 정문이며 현존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크기가 크고 오래되었다.

태조 5년(1396)에 창건되었고 세종 30년(1448)에 개축했으며, 성종 10년(1479)에 대규모의 중수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도 손상을 입지 않고 600년을 견뎌 온 조선 초기의 건축물이다.

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重層) 우진각 지붕에 다포계 형식이다.


복구를 마치고 모습을 드러낸 숭례문을 보기 위해 가족과 함께 나왔다.

이전엔 없었던 성벽의 일부를 좌우로 조금씩 내어 복구되었다.

새로 모습을 보인 성벽은 기존에 사용되었던 돌과 새로 사용된 돌들을 교차 병행하여 사용함으로써 조형미를 고려한 듯 보인다. 신구의 조화에 신경을 많이 썼음이 엿보였다.


홍예문을 지나면 낮은 울타리로 막혀있어 다시 돌아 나와야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반대편으로 연결하였다면 더없이 좋았을 것을…

홍예문 천정의 그림은 화재 당시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성벽의 돌 하나하나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전통방식을 고수하여 진행했다고 한다.

시간과 노력이 배 이상은 들어갔을 것이다.

작게나마 다시 만들어진 성벽(붓펜+피그먼드펜,브러쉬 마커 채색 ,320*240)


스케치를 하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보고 길 건너편과 앞뒤를 혼자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성벽의 모습이 가장 잘 표현될 포인트 두 곳을 확인하고 구도를 잡았다.

 

현판은 화재 당시 다행히도 불에 타지 않고 일부 파손만 되어 구해냈다고 한다.

2층 중앙에 걸린 현판은 양녕대군이 경복궁을 바라보는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세로로 써서 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화기를 누르고자 세로로 걸었건만 엉뚱한 일로 화마를 피할 수 없었다.

숭례문 현판


2008년 2월 10일 뉴스에서 생중계로 불타오르던 숭례문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방화범은 당시 69세로 재건축에 따른 토지 보상문제에 불만을 품어 범행을 자행했다고 했다.

억울함의 표현 대상이 문화재 파괴로 이어진 것은 극단적이고 용서할 수 없는 엄연한 범법행위이다.

밤새도록 타 들어가는 숭례문을 보며 가슴 아팠고 눈물이 났었다.

어릴 때부터 보아오던 숭례문을 이젠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화가 나고 슬펐다. 왜 숭례문이어야 했을까?

화재 이후 5년 2개월의 복구 과정을 통해 숭례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긴 복구과정 동안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열정이 쏟아부어졌다고 한다.

전통방식을 사용하여 복구하였고 전국에서 소나무를 기증하는 많은 기증자도 있었다고 한다.

수많은 전통기술자들의 참여와 철저한 고증을 통해 문화재 수리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복구과정에서도 순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여러 가지 문제들로 복구 이후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수도 한양의 위엄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양으로 오고 나가던 많은 백성들은 숭례문을 보며 안도했을 것이다.

한양으로 진입하는 많은 길들이 이곳으로 연결되어 있어 항시 붐볐다고 한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상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고 남대문 근처에 시장이 자리 잡게 된 배경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숭례문에 연결되어 양쪽으로 뻗어있을 성벽의 위용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일제강점기에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근대화의 물결이 급속화되면서 성곽들이 헐려 나갔다.

성벽이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동쪽으로 남산(멱목산)을 따라 흥인지문(동대문)과 연결되었고 서쪽으로는 경희궁에 이르는 돈의문(서대문)과 닿았을 것이다.

끊겨버린 성벽의 자리는 고층 건물과 차도로 덮여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문은 단절되었고 날개가 잘린 새처럼 100년을 그렇게 홀로 문을 닫고 도시 속에 은둔하였다.

서울전차(경성전차)가 다녔던 세종대로의 1968년 모습(피그먼드펜,브러쉬 마커 채색 ,210*148)

서울전차(경성 전차=노면전차)가 종로~남대문~동자동 간의 노선을 복선화 하면서 숭례문 성벽이 헐렸다.

전차는 1899년~1968년 11월 30일을 마지막으로 운행이 종료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입구에 '전차와 지각생'의 제목으로 경성 전차가 전시되어 있다.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이곳에 나왔다면 중고등학교 시절엔 친구들과 자주 왔었다.

동대문 오른편 청계천을 따라 신발 골목이 있어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었다.

브랜드 운동화와 똑같이 만들어 싸게 팔았다. 일명 짝퉁이 유행할 때였다.

싸면 쌀수록 디자인이 엉성했고 조악스러웠으며 수명도 짧았다.

오래 신는 것보다 새 신을 자주 신는 것이 좋았던 나이여서 금방 헐거워지는 신발임을 알면서도 계속 찾았던 곳이다. 지금도 신발 골목은 그대로 있다.


보물 제1호인 동대문(흥인지문 興仁之門) 은 도성의 동문이며 4대문 중 유일하게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甕城)을 갖추고 있다.
흥인문은 태조 5년 9월에 창건되었고 단종 원년(1453)에 중수, 고종 6년(1869)에 개축되어 지금에 이른다.

흥인지문은 숭례문과 유사한 구조로 정면 5칸 측면 2칸에 다포계 형식의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다.

흥인지문(피그먼드펜 ,320*240)

흥인지문의 옹성은 낙산의 지세가 약하고 지형이 낮고 평탄해 동쪽의 허함을 풍수지리적으로 보완할 목적으로 세웠다고 한다. 원래 흥인문이라 했는데 낙산의 지세가 약하여 산맥을 뜻하는 지(之)를 넣어 보완한 것도 같이 이치다. 과거 동대문 일대는 습지지역이라 토목공사가 힘들었다고 한다.
숭례문은 조선 초기 양식의 특성을 지닌 반면 흥인지문은 조선 말기의 건축미를 갖추고 있다.


흥인지문의 오른쪽 성벽은 지금의 DDP(구 동대문 운동장)를 지나 광희문(남소문)과 연결되고 남산을 따라 올라가 숭례문과 연결되었었다. 왼쪽으로는 낙산 성곽길로 연결되어 있다.(2015년 복원)

흥인지문도 숭례문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도시정비의 명목으로 성벽은 모두 철거되었고 한동한 나 홀로 섬에 갇혀 지냈다.

1970년의 흥인지문- 섬처럼 동떨어진 외로운 모습(피그먼드펜 ,210*148)


거무스름하게 그을린 듯한 옹성의 돌들이 세월의 풍파와 외로움을 보여주는 듯 보인다.


옹성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은 없다. 진입이 통제되어 멀리서만 볼 수밖에 없어 늘 내부가 궁금했다.

담벼락으로 막힌 집의 내부가 궁금한 것처럼 이곳을 지날 때마다 호기심은 늘 있다.

옹성 오른쪽 끝으로 돌아가면 휀스로 막혀있긴 하지만 내부를 살짝 볼 수는 있다.

흥인지문(피그먼드펜 ,210*148)


반달형 옹성의 구조를 갖춘 성문으로 내가 가본 곳은 흥인지문, 수원화성의 팔달문과 장안문, 창룡문, 전주의 풍남문이 있다. 규모와 형태의 차이는 있지만 조선 후기 건축물의 특징들을 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년~1956년)영국 판화가로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 풍속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린 작가다.

많은 그림 중 흥인지문을 배경으로 그린 그림들이 있어 소개한다.

왼쪽부터 '아기를 업은 여인', 해질 무렵의 서울 동대문', '달빛 아래 서울의 동대문' 순이다.

외국인이 본 한국의 모습과 표현방법이 색다르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출처


국보와 보물의 차이

'보물'은 

건조물·전적·서적·고문서·회화·조각·공예품·고고자료·무구 등의 유형문화재 중 중요한 것
'국보'는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인류문화의 견지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

국보나 보물의 지정번호는 가치의 높고 낮음의 순서가 아닌 지정된 순서에 따른 것이다.


왼쪽 숭례문-오른쪽 흥인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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