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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석 Oct 13. 2017

#3 전주, 조선을 열다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 전동성당, 풍남문, 전주향교 여행기

전주로 여행을 떠나기 전 문화유산으로 가득할 이곳을 상상하니 설렘이 어느 때보다 컸다.

전라도 쪽으로는 거리가 멀어 자주 다니지 못했고 가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뭔가 새로운 것들이 많을 것만 같았고 좋은 추억을 간직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가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전주 한옥마을 주변으로 경기전, 풍남문, 전동성당, 전주향교 등이 근거리에 모여있어 도보로 이동해도 다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도시도 흔치 않다.



전주 한옥마을

새벽 일찍 출발하여 오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피곤함은 도착과 동시에 말끔히 사라졌다. 점심을 먹고 전주 한옥마을부터 첫발을 내 디뎠다.

관광 안내소에서 지도 하나를 받아 들고 골목골목을 신나게 헤집고 걸었다.

전주한옥마을-전동성당-경기전-풍남문-전주향교 코스

딸은 역시나 준비해 온 한복으로 갈아 입고 전통가옥이  즐비한 거리를 공주처럼 사뿐 사뿐 걸었다. 주말이어서 인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골목마다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의 인기를 실감했다.

 합각에 새겨진 국화가 아름답다. 꽃을 그려 넣은 작가의 센스에 100점을 주고 싶다.

걷다 보니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옥마을이라 전통가옥의 운치를 기대했는데 그 느낌은 사라지고 온갖 상점과 음식점들로 채워져있어 껍데기만 한옥 건물인 상권 마을이 된 느낌이 들었다.

유명세를 타며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급격한 상업화가 진행되었고 주거지역이었던 이곳의 거주자들은 하나둘씩 건물을 매각하고 떠났다고 한다.

이전의 모습은 퇴색되어 마을은 고유의 색을 잃어 버린 것 같았다. 한옥으로 가득찬 거리와 수수한 전통거리를 상상하며 왔는데 피자와 스파게티등의 음식점들로 채워지고  커피상점은 과장 조금 보태서 10m마다 있는 것 같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홍대 인근, 가로수길, 경리단길, 연남동, 서촌 등 낙후되었던 구도심에 외부인의 유입 증가됨으로서  긍정적인 요인도 없지 않지만 최근 재활성화된 지역의 임대료 상승과 주거지역 환경의 훼손으로 기존 거주자들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있는 현상들이  문제점으로 거두 되고 있는 현실이다.  


전주 한옥마을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1990년 중반에만 해도 몇몇 한옥과 단독주택이 모여 있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2000년 후반 전주시가 관광지로 정비하면서 한옥 신축을 늘리고 기존 건물들을 철거하며 주변 관광지의 문화와 융합하여 특색을 갖춘 마을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진행되었다.

소규모 예술인들의 활동으로 이 곳의 문화적 정취를 더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2012년 후반부터 SNS를 통해 사람들의 관심이 증폭되면서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잦아지게 되었다.

사람들이 몰리면서 소음, 주차문제, 상권 형성 등의 여러 문제들이 생겨나며 주거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전주에서 택시를 탄 적이 있는데 기사님은 요즘의 한옥마을의 변화된 모습이 안타깝다고 하셨다.

몇 년 후 이 호황이 걷히고 시들 해졌을 때 유령마을이 될까봐 걱정하셨다.

여유로움과 정취는 사라지고 남의 옷으로 갈아입은 것처럼 선 모습이 왠지 씁쓸하다.

몇몇 가옥을 지키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데 그분들에게 고마움이 느껴진다.

그림 그릴 곳을 찾지 못하여 속상했다. 



전동성당

아쉬움을 뒤로하고 전동성당으로 향했다.

전주를 여행지로 정한 가장 큰 이유는 전동성당과 경기전을 보기 위함이었다.

이 두 곳은 길 하나(태조로)를 두고 마주하고 있다.

어디를 먼저 갈지 잠깐 고민 했는데 성당의 모습이 먼저 들어 왔다.

소문과 사진으로만 구경하며 군침만 흘리다 실제 전동성당의 자태를 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아...잘 왔구나 싶었다.

예전에 유럽으로 여행을 다닐 때 보았던 밀라노 대성당, 슈테판 성당, 성소피아 성당, 두오모 성당을 처음 보았을 때의 감격과 감탄의 느낌이 여기서도 느껴졌다.

그때의 감동과는 비교 조건이 다르지만 근대에 한국에서 이런 건축물을 만들  있었던 기술력과 건축적 미학에 놀라울 뿐이다.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건축물로 표현될 때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놀랍다.

입구에서 정면을 올려보며 아주 천천히 보고 싶을 만큼 마음에 쏙 들었고 어디를 그릴지 머리가 복잡했다.

여기저기 구도를 잡아보며 가장 이상적인 포인트를 찾느라 정신없이 혜매다 마땅한 위치를 잡고서야 맘이 편안해졌다.


한국에서 천주교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천주교 박해로 많은 신도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를 당한 고난의 과거를 겪었다. 신해박해(1791), 신유박해(1801, 순조 1년), 기해박해(1839, 헌종 5년), 병오박해(1846, 헌종 12년), 병인박해(1866~73, 고종 3년)의 천주교 박해 사건들이 있었다.

천주교 박해는 시기마다 이유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유교의 제사의식 거부와 신분사회에 반하는 인간평등사상이 사회질서를 혼란케 한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당파싸움으로 권력을 빼앗기 위해 이용되었고 서양세력의 진출에 대한 강한 거부감 등이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전동성당은 1791년 신해박해 때 천주교인들이 순교했던 풍남문 밖에 있었다고 한다. 후에 순교지인 이곳에 프랑스 파리 의방 전교회 소속의 보드네 신부가 부지를 매입하여 1908년 V.L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1914년에 준공된 건축물이라고 한다.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된 건물이다.

전동성당 정면

회색 벽돌과 붉은 벽돌이 장재로 치장되었고 내부의 아치형 천장과 중앙의 좌 돔 형태는 비잔틴 양식이 적용된 종탑이 있다.

건축 당시 풍남문의 성벽을 헐어내 성당 주춧돌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전면에 길게 뻗어 올라간 첨탑의 수직선 사이로 조각처럼 새겨진 창의 모습은 이국적인 느낌이 강하게 풍겼다.

회색 벽돌과 붉은 벽돌이 조화롭게 배치되면서 형태의 윤곽을 더 뚜렷하게 만들고 다.

중간중간 벽돌 쌓기 방법의 변화를 주면서 단조로움을 없앴다.


전면부의 화려함이 주는 매력 못지않게 후면의 건축미도 아름답다.

화려하진 않지만 잔잔한 무게감이 있다.

건축가는 전면과 후면의 강약을 고려하여 설계했을 거란 생각이 문뜩 들었다.

전동성당 후면

일요일이어서 성당 내부에서는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미사 도중에도 내부를 보기 위해 수시로 드나드는 관광객들로 어수선했다.

특히 사진을 찍으며 시끄럽게 떠드는 중국 관광객이 유독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인원 통제를 할 만도 한데 이런 상황이 익숙한 것인지 막아서는 관계자 하나 없다.

교인들도 뒤 돌아보는 이 하나 없다.

모든 종교 건축물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요즘에 지어지는 교회들을 보면 너무 현대적인 형태로 지어지고 있다. 잘못되었다고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종교 공간에서 느껴지는 경건한 분위기는 건축물의 형태와 밀접하게 작용한다고 생각된다.

난 종교는 없지만 사찰이나 성당 등을 돌아보면 엄숙함과 경건함이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그냥 좋다.  


한국에 대표적인 성당으로 손꼽히는 건축물이 3개가 있다.

전동성당(1914년)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명동성당(1898년), 대구 계산동 성당(1902년)이다.

(왼쪽부터 사진순서로)

조금씩 규모와 형태의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전동성당이 가장 맘에 든다.

과하지 않고 누추하지 않으며 화려함과 절제가 적절하게 반영되어 편안하게 다가온다.

건물 주변을 이리저리 여러 번 돌아본 후에도 쉽게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전주 경기전 [全州慶基殿]

길 하나를 건너면 경기전이 있다.

근대 건축과 전통 건축이 마주 보며 자리한 이곳의 특색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매력인가 보다.

길거리엔 한복을 입은 여행객들이 인증샷을 위해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포즈가 다양 각색이다.

경기전과 전동성당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후손과 왕족들이 천주교를 박해했는데 보란 듯이 조선 건국의 상징적 건축물 앞에 성당을 버젓이 세운 걸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우뚝 쏟아 경기전을 내려보고 있는 전동성당을 태조 이성계는 어떻게 생각지 궁금해진다.



태조 이성계는 함경도 영흥 출생이지만 본관은 전주이다.

태조는 한양, 개성, 전주를 3경으로 승격하면서 전주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후에 태종 이방원이 선조를 모시기 위해 본관인 전주에 경기전을 지었다고 한다.

경기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하기 위한 사고[史庫]가 있다.

어진(御眞)은 임금의 초상화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왕조의 역사와 함께 제작되어 왔다.

어진의 제작방법에 따라 3가지로 구분되는데 도사(圖寫), 추사(追寫), 모사(模寫)이다.

도사는 왕이 생존 시 그린 것, 추사는 왕이 승하 시 그린 것, 모사는 이미 그려진 어진을 다시 모 사하여 그린 것이다. 이 곳의 어진은 모사라고 한다.

태조 이성계 어진

인물화를 그리는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몆년째 인물화 연습을 하고 있는데 가장 가까운 가족을 그려도 인상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어렵다.

임금의 용상을 그리는 화원의 부담감은 말도 못하게 더 컸을 것이다.

태조 어진은 청색의 곤룡포를 입고 입다.

보통 붉은색 곤룡포를 입은 왕의 모습이 익숙한데 청색이라 좀 의아했다.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명나라를 섬기는 조선의 왕이 홍색의 곤룡포를 입기 시작한 것은 1444년(세종 26년)에 명나라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은 이후라고 한다.

그 이전엔 고려왕실의 복식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태조 어진의 모습은 넓은 어깨와 풍채를 표현한 건장한 무인의 기품이 풍긴다.

뒤쪽으로 어진 박물관에 태조 어진 원본과 세종, 정조,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들과 왕실 기록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난 정조의 어진이 젤 잘 그렸다고 생각했다. 일단 잘 생기게 그렸다.


경기전은 전주시 중심에 5만여 M2의 녹지공간에 조성되어 있어 전주시민에게 편안한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한복을 차려입은 외국인들과 가족, 연인 등 많은 사람들로 활기가 넘친다.

과거의 위엄은 사라지고 시민들이 편하게 왕래하며 쉬는 공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조선 초기의 건축물답게 권위와 위엄을 강조하여 본전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룬 정형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태조의 어진이 모셔져 있는 경기전 정전

경기전의 모든 건물의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장엄함과 위엄을 표현할 때 지붕의 형태로 많이 쓰이는데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모신 왕가의 사당인 종묘도 대부분의 지붕형태가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그림을 그릴때는 맞배지붕이 합작지붕이나 우진각 지붕을 그리는 것 보다 더 쉽다.

형태가 단조롭긴 하지만 힘이 있다.

정전 스케치는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지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지붕이 맘에 들어서인지 잘 그리고 싶은 욕심이 났던 것 같다.

정전


경기전에는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어 있는 전주사고가 있다. 

생각보다 규모가 작아서 놀랐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철종에 이르기까지 472년간 기록한 왕실 기록문서이다.

사관 이외에는 왕도 볼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보안이 유지되었던 기록물이니 만큼 절대왕권을 누리던 임금조차도 간섭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고 한다.

국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을 기록하다 보니 임금도 매사 언행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록은 왕이 승하한 이후 사초(그때그때 작성한 국정기록)를 기반으로 실록청에서 편찬하였다.

내용을 정리하여 완성되면 전국의 사고로 나누어 봉안되었다.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에 4 부를 작성하여 보관하였다.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는데 유일하게 전주사고의 실록만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문제점을 의식하고 더 깊은 산속으로 장소를 옮기며 5 사고(춘추관,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 정족산)로 나누어 보관하게 되었다.

실록은 전쟁과 일제시대를 거치며 소실되거나 도난당한 것들이 많아 아직도 해외에서 돌아오지 못한 것들이 많다. 안타까운 일이다.

 

전주 사고

사고는 문서보안과 보존을 목적으로 하기에 보통 지상에서 이격 시켜 방화와 방습을 피하기 위해 2층으로 올려 지었다.

요즘의 국가기록물은 데이터로 보관하고 있다고 하는데 안전하게 보관되고 있는지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미루어 보면 사뭇 의심스럽다.

나도 일기를 쓰고 있는데 보관함 하나 만들어야 하나? 내 기록도 소중하니까!



전주 풍남문[全州 豊南門]

경기전을 나와 남부시장 쪽으로 가다 보면 보물 제 308호인 풍남문이 있다.

풍남문은 전주부성의 남문으로 4문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문이다.

보자마자 수원의 팔달문이 떠올랐다. 비슷한 듯 하면서도 소박한 느낌이 들었다.

남대문, 동대문처럼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사라지거나 잘려나간 성벽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곳도 덩그러니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어 외로워 보였다.

주변에 낮게 둘러싸인 상가와 주택들이 성벽으로 연결되었을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원래 뻗어 있을 성곽의 방향은 가늠할 수 없었지만 경기전으로 들어오는 가장 가까운 문이니 만큼 아마도 사라진 다른 문들보다는 가장 중요성이 높은 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밤에 야간 조명이 비친 풍남문은 낮의 외로운 모습은 어디 간데없고 화려하게 보였다. 



전주향교 [全州鄕校]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된 향교 중에 하나라고 한다.

서원은 여러 곳을 다녔지만 향교는 처음이다.

유독 은행나무가 많아 가을에 오면 노랗게 물든 광경이 볼만 하다고 한다. 여름이라 때가 맞지 않아 아쉽다.

향교에 은행나무가 많은 이유는 오래 살며 벌레가 끼지 않아 이곳에서 교육받는 선비들이 청렴한 정신을 이어가라는 의미가 있어 많이 심었다고 한다.

향교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유학을 교육하고자 설립된 국립 지방 교육기관이었다.

반면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설립된 사립 지방 교육기관이다.

고려말에 창건된 전주향교는 원래 경기전 근처였으나 강학 소리가 시끄럽다고 하여 지금의 신흥중고등학교부지로 옮겼다가 현재 이곳으로 다시 이전되었다고 한다.

돌아간 신 분 영정을 모신 곳에 소음이 있다고 이전시킨 것을 보면 요즘의 아파트 층간 소음은 양반이란 생각이 든다. 그만큼 유교사상의 영향이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향교 뒤로 산을 등지고 있고 앞으로는 전주천이 흐르고 있다.

조선시대는 숭유억불 정책을 기반으로 유학 교육에 전념하기 위해 관학 기관인 한양에 성균관,

지방에 향교를 두어 교육을 전담하였다.

이 두 곳은 문묘[文廟]를 반드시 건립해야 했다.

문묘는 유학의 성인인 공자와 그 제자인 안자, 중자, 자사, 맹자 등의 위패를 모시는 것으로 대성전에 공간을 마련하여 성현의 덕을 실천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성현의 위패는 대성전과 좌우로 동무와 서무로 나뉘어 봉안되었다.

전주향교는 만화로, 일원 문을 지나 앞뜰에 문묘(대성전), 뒤 뜰에 강학 공간인 명륜당과 좌우로 유생들의 숙소 공간인 동재와 서재로 구분되는 전묘 후학 (前廟後學)의 배치를 하고 있다.

앞뜰과 뒤뜰에는 수령이 400년 이상 된 은행나무들이 있어 오랜 기간 이곳을 수호하는 듯 보였다.

명륜당 스케치
명륜당

명륜당의 지붕 모양이 특이하여 눈길을 끌었다.

좌우로 눈썹 지붕이 날개를 단 듯 펼쳐진 지붕 형태는 처음이라 생소하게 보였다.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명륜당이라고 하는데 나무의 색상이 짙어 연륜이 있어 보였다.

명륜의 의미는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강학에 근본이 되는 교육장에 의미를 둔 이름이라 여겨진다.


역사책을 읽다 보면 유교가 조선의 개국 이념으로 채택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현실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상상해 보곤 한다.

유교는 삼강오륜, 관혼상제 등 조선 500년을 이끈 주요 사상이자 정치 철학이었다.

고려 말 타락한 불교를 개혁하고자 성리학을 받아들였다는 시대적 상황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한다.

만약 조금은 개방적이고 합리적으로 변화된 방식으로 수용했다면 현재까지도 뿌리 깊게 한국인의 의식에 전달된 유교적 문화가 조금은 발전적으로 변화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수많은 침략과 전쟁, 수탈이 조금은 줄어들었을 수도 있고…. 역사는 정답은 없지만



문화재를 돌아보면 거의 모든 곳이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없었다. 중국, 몽골, 일본, 6.25등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고 우리 문화유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미래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힘이 되리라 믿는다. 가장 자기다움이 가장 큰 무기가 아닐까?


가족과 종일 도보로 다니다 보니 저녁 즈음엔 녹초가 되었다.

9살 딸은 힘들 만도 한데 군소리 없이 잘도 따라다닌다. 중간중간 달달 한 간식만 챙겨주면 아무 말이 없다.

저녁에 숙소에서 잠깐의 피곤함을 녹이고 야경을 보고자 다시 밤거리로 나왔다.

야경을 봐야 한다며 숙소를 나오는 열정만큼은 대단하다고 여긴다.

불빛을 받은 전동 성당, 풍남문의 야경은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고 밤에도 불야성을 이룬 상점과 음식점들 사이로 여행객들은 분주했다.

전주에 맛 집으로 유명한 곳이 많은데 구경하느라 많이 가보지 못한 것이 좀 아쉽다.

전주천을 내려보고 있는 청연루

전주에서 1박 2일을 보내고 순천과 여수, 하동, 군산으로 이어지는 빠듯한 여행 일정 속에서 움직이다 보니 미처 보지 못한 오목대, 풍패지관(전주 객사), 자만 벽화마을, 전주 역사 박물관등을 보지 못하였다.

다음을 기약하며 다시 찾을 기회만 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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