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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석 Sep 20. 2017

#1 광화문에서 행복의 시작을....

내 가족의 웃음을 찾아서

이곳에서 제가 행복해져 가는 삶의 과정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6년 전 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참 일할 나이여서 인지 업의 성격상 그런 것인지 바쁜 일상의 이유를 가늠하기 모호한 시절이었습니다.

회사 업무가 끝없이 쌓여 잦은 야근과 회식으로 정신과 육체가 피폐해져 가던 때였습니다.

업무 스트레스는 가족에게로 전가되어 아내와 사이가 좋지도 않았습니다.

4살 된 딸은 유독 엄마에 대한 집착이 컸고 한시도 떨어지지 않아 아내가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아내는 바쁜 남편에게 기댈 수 없었고 각자의 불만은 부부싸움으로 이어졌습니다.


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쁘게 살고 있는 걸까? 행복한가?

가족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지도 못하면서 일을 핑계로 매번 가족은 뒷전에 두고 있었습니다.

힘든 시간들은 끝날 것 같지 않았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조금만 더 잘 하면.....이 시기만 지나면. . .

나아지겠지라며 스스로 최면을 걸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고 부질 없는 망상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는 왜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는지 철없는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삶의 방법을 바꿔보려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좋은 날이면 가끔 아내는 어린 딸을 데리고 퇴근시간에 맞춰 회사 근처에서 기다렸다가 외식을 하곤 했습니다. 가끔의 외식이 좋지 않은 관계를 회복하기에 조금은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회사는 광화문 근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내와 딸이 기다리며 자주 가던 곳이 경희궁과 광화문이었죠.

경희궁

그래서인지 어린 딸은 전통건축이 보이는 곳이면 아빠 회사라며 좋아했습니다. 전통 건축만 보면 아빠를 볼 수 있었으니 아마도 그리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사찰에 가도 아빠 회사라고 할 정도로 아이의 시선은 동일시되었나 봅니다. 딸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아내와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우리 가정의 불안함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 방법의 선택 기준의 가장 우선순위는 딸과 아내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여행이 해답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작정 매주 주말에 떠나기로 했습니다.

어디를 갈 것인지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광화문

전통건축에 대해서 딸은 이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상태였고 아내와 저는 원래 관심이 많아서 전국의 사찰, 궁궐, 고택, 산성 등지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6개월을 매주 다니고 보니 가족의 얼굴엔 미소가 띠기 시작했고 서로를 아끼게 되었습니다.

가족과 함께할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빠에게 곁을 주지 않았던 딸이 엄마에게서 아빠에게로 집착이 분산되었습니다.


여행을 다니다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 언젠가부터 스케치북을 챙겨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행지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옆에서 딸도 같이 스케치북을 펼칩니다. 그런 모습을 아내는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아빠와 딸이 그림을 그리면 엄마는 한가로이 책을 읽었습니다.

딸도 자연스레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지금도 항상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특히 아빠가 그려준 그림은 보물처럼 소중하게 아낍니다.

6년 동안 우리 가족은 여행을 다니며 180 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생떼와 고집이 하늘을 찌르던 어린 딸은 벌써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습니다.

여행에서 산 깊숙이 있는 사찰을 찾아 한참을 걸어도 짜증 한번 없이 씩씩하게 잘 따라다닙니다.

참 대견할 뿐입니다.


처음 딸이 아빠 회사라 여겼던 광화문을 스케치 여행의 첫 번째 이야기로 올릴까 합니다.


광화문 광장이 생기기 전에는 광화문으로 진입하려면 꽤 번거로웠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광장에서 광화문을 정면에서 바로 볼 수 있어 보기가 좋지만 예전엔 차도였기 때문에 지금처럼 정면을 바라보기가 어려웠고 차를 타고 지나가며 차창을 통해 힐끗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광화문 광장 중앙에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을 차례로 지나면 웅장한 자태로 광화문이 버티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왕을 등지고 있다고 하여 논란이 있기도 했다죠..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지기 이전에 세종대왕 동상이 먼저 있었고 그 이전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4.19 혁명 때 민중들에 의해 이승만 동상이 부서지고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진 거라 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세종대왕 동상 대신 일본이 가장 무서워하는 인물로 이순신 장군이 선정되면서 문인보다는 무인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교체되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와 논의를 거쳐 진행되었겠지만 시대적 상황이 만든 결과라 생각되어집니다.

따지고 보면 광화문 앞 광장의 자리 주인은 원래 세종대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광장을 새로 조성하면서 세종대왕 동상이 제자리로 돌아온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세종로에 세종대왕 동상이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럽긴 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작가 김세중 씨가 1968년 4월 27일에 제작하였다고 합니다.

장군의 칼이 오른손에 쥐어져 있어 왼손잡이냐는 논란도 있었죠.

이 논란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제작 당시 충무공이 오른손잡이임을 염두에 두고 기획되었으며 오른손에 칼을 쥐고 있는 것은 승리자의 기념비로서 칼이 상징하는 실천적 힘과 조국수호에 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적에게 칼을 뽑으려는 형상이 아니라 적을 물리친 승리자로서의 상징적 자세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동상을 제작한 김세중(1928~86) 작가는 서울대학교 조소과 교수로서 주로 종교분야의 작품 활동을 많이 하셨던 분이라고 합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후반까지 기념 비상을 많이 제작하였는데 그 시기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제작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어릴 적에 동상을 보며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칼집의 크기가 너무도 커서 아무리 생각해도 칼을 뺄 수가 없어 보였습니다. 칼이 빠지려면 팔의 길이가 길거나 칼집보다 칼은 좀 작게 만드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비례가 비슷한 막대기를 옆에 차고 칼을 빼는 시늉을 해보면 칼이 빠지지 않았었습니다.

어린이는 안되고 어른이 되면 되는 줄 알고 더 크면 다시 해보리라 생각했었죠..

그러나 어린이의 호기심은 어른이 되면서 사라지고 없네요.

세종대왕 동상은 이순신 장군 동상보다 비례상으로 보면 더 크게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군신관계는 어쩔 수 없나요?


딸은 두 동상을 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을지 궁금합니다.

기회가 되면 슬쩍 물어볼까 합니다.


광화문(光化門)은 수난이 참 많았던 건축물입니다.

광화문의 이름은 세종 8년(1426년) 집현전 학자들이 지어 지금에 이른다고 합니다.

1395년(태조 4년) 9월에 창건된 경복궁의 정문이었습니다.

임진왜란(1592년)에 소실된 채로 276여 년간 방치되었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제 모습을 다시 갖추었다고 합니다. 1926년 조선총독부가 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해체하여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이전시켰습니다.


그리고 6·25 전쟁 때 석축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1968년에는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으나 도로확장 때문에 원래 위치보다 뒤쪽으로 밀려버렸습니다.

총독부 청사를 가릴 목적이었으므로 경복궁의 정면 축과 다르게 설치되었습니다. 2006년 12월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되어 원래의 방향과 위치에 맞춰 지금의 모습은 갖추게 되었습니다.

총독부 청사가 철거되기 전까지 국립중앙 박물관으로 사용되었었습니다.

어릴 적 이곳에 구경 갔던 기억이 납니다. 로비가 엄청 크고 화려했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 건물을 짓기 위해 경복궁의 많은 건축물들이 헐렸다고 합니다. 참으로 억울한 과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광화문 좌우로는 원래 서십자각과 동십자각이 담장 끝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서십자각은 사라졌고 동십자각만 덩그러니 홀로 동떨어져 자리하고 있습니다.

복원을 하면서 콘크리트로 제작되었던 일부분을 잘라내어 서울역사박물관 앞마당에 전시해 놓았습니다. 직접 보면 콘크리트로 저렇게 정교 하게 만들 수 있는지 손재주가 참 놀라울 뿐입니다.

최근에는 광화문 현판의 글씨 색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흰색 바탕에 검정 글씨로 되어 있지만 100여 년 전 사진을 분석해보니 색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최근 문화재청에서 열심히 고민하는 중인 것 같습니다.

바뀌기 전에 사진 하나 찍어 놓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광화문과 수문장

광화문의 광화(光化)는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왕의 덕이 부족하면 백성은 여러모로 힘들어지겠죠.

최근 광화문 광장에서 많은 국민들이 촛불을 들었습니다.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추지 못하여서 촛불로 광장을 비추었습니다.


광화문과 광장은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있는 곳입니다.

알면 알수록 흥미롭고 의미가 깊은 장소입니다.

과거 광화문 앞은 육조거리로서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며 사람 사는 향기가 나는 곳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이 힘든 시기에 시민들이 모여 목소리를 모아 변화를 같이 했던 장소이며 기쁨과 아픔을 나누는 곳이었습니다. 한때 사람의 향기를 제거하며 막아섰던 시절도 겪었습니다.

이제 조금씩 변화되어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 변화에 나와 가족이 함께 했고 좋은 기운을 받아 행복해져 가나 봅니다.

가끔 딸과 이곳에 가면 옛날 이야기를 묻곤 합니다.

아직도 아빠 회사라고 생각이 드는지?

어릴 적 이 곳의 기억이 나는지?

그럼 딸은 씨익 웃기만 합니다. 그리고 내 손을 꼭 잡고 안아줍니다.

말보다 행동으로 모든 걸 말해주는 것 같아 고마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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