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이 있어 가능했던 일
넷플릭스에서 '볼만한 것이 없을까?'라며 스크롤을 이리저리 하다가 응답하라 시리즈가 전부 올라와있길래 하나씩 보기 시작했고, 결국 모든 시리즈 정주행에 성공했다.
응답 시리즈는 실제 있었던 사건들(삼풍백화점 붕괴, HOT 팬클럽 등)을 드라마의 배경으로 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 가족 간의 따뜻한 이야기, 친구들과의 우정, 사랑하는 사람과의 연애 등 우리들의 인생에서 당연하게 일어나고 있을 법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은 드라마였다. 내가 그 시절에 살았다면 충분히 공감하며 그리워할 만한 내용들로 꽉꽉 채워져 있었기에 실제로 그 시대를 지내온 부모님 세대에게 인기가 없을 수 없는 드라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 화를 거듭하면서 연결되는 흐름과 함께 새로운 에피소드들이 나왔는데, 전 시리즈를 보면서 응답하라 1988에서 바둑기사로 나왔던 최택과 응답하라 1994에서 야구선수로 나왔던 칠봉이를 보며 문득 느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나'로 지낼 수 있었던 이유’이다.
응답하라 1988 중에서 최택이 기록을 깨 가면서 연승을 하다가 신인 바둑기사를 만나 졌던 에피소드가 소개되었다. 천재 바둑기사의 패배가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이기도 했지만, 혹여나 심기가 불편할까 봐 이를 대하는 태도들이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최택의 부모님도, 동네에 함께 사는 어르신들 모두도.
하지만, 친구들은 그렇지 않았다. 힘들어할 것을 알면서도 자기들의 아지트인 최택의 방에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각자의 부모님들께서 택이를 괴롭히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고서는 다들 모여서 택이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넌 거기서 졌으면 안 된다고. 천재 바둑기사는 절대 한 번도 져서는 안 된다고. 그랬더니 택이가 “나는 왜 항상 이기기만 해야 하냐며 나도 질 때도 있는 거지!” 하며, 한 번도 큰소리 내지 않던 사람이 울분을 토하며 이야기를 한다.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넌 최택이니까”
그리고는 화를 내고 싶으면 내라며 욕을 해보라고 한다. 친구들의 재촉에 어설픈 욕을 여러 차례 내뱉은 택이는 그들 사이에서 대국에서 패배하면서 받은 스트레스가 다 풀렸다는 듯한 웃음을 보인다.
응답하라 1994에서는 괴물 야구선수 칠봉이가 나온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게 되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어딜 가나 사인을 해달라고 요청을 해올뿐만 아니라, 한국을 빛내는 위대한 야구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칠봉이가 하숙집을 찾아갈 때면, 그 장소에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는 더 이상 위대한 야구선수가 아니라 그냥 칠봉이가 된다.
“어, 칠봉이 왔어?” 외에는 다른 것은 없는 그들 사이에서의 칠봉이는 자기가 받아오던 환대와 인기 선수로서의 대접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에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내 평소 칠봉이의 모습으로 친구들 사이에 스며 들어간다.
두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작가님과 감독님이 비추려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 100%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느낀 것은 천재 바둑 기사도, 한국 최고의 메이저리거 선수여도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냥 우리들의 친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존재의 의미는 충분하다는 것. 그러면서 내가 지금의 나로 있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집에서 주변에서 내비치는 기대들이 중압감으로 다가오는 때가 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의도치 않게 집중을 받아왔던 터라 모두의 기대가 부담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고,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면 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조용히 지내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에게 집중을 받는 것이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기 때문에.
근데 나의 친구들은 달랐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하는 기대와는 다르게 그냥 한 명의 친구로서 나의 존재를 바라봐주었다. 내가 무언가를 해냈다고 해서 그들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그들의 친한 친구 중 한 명이었을 뿐.
그래서 나는 친구들 속에서 그냥 나 자체로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음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동안 받아왔던 중압감과 부담감은 잠시 잊고, 내가 진짜 나의 모습으로 온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그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한결같은 태도가 내가 자만하지 않고 스스로를 점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음에.
오늘 저녁엔 친구들에게 안부인사나 해야겠다.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건강은 괜찮은지, 회사에서 별일은 없었는지.
그리고 이제 좀 만날 때가 된 것같지 않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