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점 맞았다. 볼을 살짝 꼬집고 뺨을 톡톡 두드려본다.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한답시고 세게 비틀어 꼬집거나 뺨을 후려쳐 셀프따귀를 날리는 건 88 올림픽 시절에나 어울린다. AI 최첨단을 달리는 2023년 봄에는 요렇게 살짝과 톡톡. 소프트 터치가 제맛이다.
엔데믹시대로 접어들자, 온갖 메신저 창이 뜨겁다. 싱가포르에서 보자, 일본은 어때, 두바이가 당신을 환영합니다. 온갖 오프라인 해외전시회가 재개되며 고삐 풀린 바이어들은 난리부르스다. 샘플오더, OEM, 협력사업에 대한 논의로 정신없는 4월의 한복판은 태풍의 눈동자처럼 절대로 고요하지 않은 혼란 속이다. 얘들아, 반갑고 고맙다만 살살 좀 하자. 요즘 내 상황이 말이야. 퇴고는 맞춤법 검사의 미로에서 길을 잃었고, 내 글 별로병이라는 치명적인 중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글쓰기모임 글도 써야 하고, 문장공부도 밀려있는데 학교는 아이구 이런 젠장 벌써 중간고사 기간이란다. 한마디로 정신머리 없는 시즌이란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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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통 같은 일상 속에 중간고사를 치렀다. 늘그막에 이 무슨 주책이람 하고, 이 나이에 무슨 공부람 하며 넋 놓고 한탄스러운 시간을 보내다가 시험일자가 다가오니 진땀절절 안절부절 팽팽한 긴장선이 흐른다. 수많은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노익장을 과시해 보자 다짐하며 공부에 매달렸지만, 팽팽 돌아가던 머리는 어디가고 깊은 한숨만 방구석 한가득 차오른다. 전혀 즐겁지 않다. 연필을 내려놓고 다시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공부를 하고자 한 첫 마음으로 돌아가보니, 지금 내가 젊고 똑똑한 학우들과 가당치도 않은 성적 경쟁을 해서 장학금 타고 뭐 그러려고 한건 분명 아니었지 않은가. 오로지 문학에 대한 애정과 사랑으로 문예창작학과의 문을 열어젖히고 새로운 꿈과 배움을 발견하자는 마음 아니었던가. 연필을 다시 든다. 마음을 내려놓고 다시 보니 다시 즐거워진다. 공부가, 문예사조가, 스탕달, 발자크가 귀엽다니, 시험이 즐겁다니, 학교 오프라인 캠퍼스에도 가보고 싶다는 둥... 살다 살다 별일도 다 있다. 하다 하다 실성한 거냐?
D-Day 시험일이다. 회사에 오후 반차를 내고 집에 돌아와 목욕재계하고 노트북을 켠다. 시작이다. 시험은 그저 평소실력으로 푸는 것. 자 풀어보자. 느긋하게... 헛. 첫 문제부터 쫄깃하다. 어후후 갑자기 심장은 북 치듯 고동치고 의식은 자꾸 저 멀리 먼 나라 이웃나라 수평선으로 날아가려 한다. 타임워치는 째깍거리며 종료시간으로 나 잡아봐라 치닫는다. 시간에 쫓기다가 '이러다가는 폭망이다' 정신이 번쩍인다. 천정을 바라보며 나만의 필살기 복식호흡을 시도하며 평정심을 끌어당긴다. 쫄깃함, 덜덜떨림, 안절부절, 어수선은 사라지고 다시 제정신 비슷한 의식은 돌아오고 어느덧 문제에 몰입해 있는 나를 발견한다. 몰입의 시간은 인식할 수 없다. 인식 저 너머의 시간이다. 아. 내 모습이지만 참으로 근사하다. 멋지다. 멋져. 이런 모습 참으로 얼마만인가. 그래 그럼 된 거다. 시험종료 버튼을 누르고 쿨하게 퇴장한다.
D+1 시험 다음날이다. 시험결과 점수를 확인하고는 또다시 심장이 쿵쾅거린다. 100점이라니. 세상에 이런 일이. 회사 동료들이 점심 먹으러 가자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지만, 그저 미소 지으며 한마디 한다. "난 오늘 점심 안 먹어도 배부르니 다녀들 오세요~."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말할 순 없다. 1급 보안사항이니 입은 굳게 다물지만 자꾸만 미소가 새고 흥분이 흐른다. 이 황홀경이란.
이 것이, (수십 년 전) 인천제물포 고등학교 전교 3등의 위엄이라든가, 교과서만 보고 공부했어요라든가, 하루에 잠은 8시간 푹 잤답니다라는 재수없고 허세스런 가상 인터뷰는 겸손히 뒤통수로 물려야 한다. 지금은 그저 배울 수 있음에 감사하고, 배운 걸 인식하고 기억하며 재밌어 할 수 있음에 고마워야 할 일이다. 상처받은 뇌세포가 돼살아나진 않았겠지만, 이웃세포들이 그나마 열심히 애쓰고 있음에 감사 또 감사해야 할 일이다.
타인이나 세상에 오래도록 갈구했던, 그렇지만 언제나 충족되지 않았던 갈증. 그런 결핍과 결여에 시달려온 불만스러운 시절들, 이런저런 삶의 거대한 벽에 부딪혀 위축되었던 시간들. 어쩌면 잊고 있던 건, 모르고 있던 건, 내가 나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 바로 그 마음 아니었나 싶다. 밖에서가 아닌 안으로부터의 인정. 세상과의 승부가 아니라 나와의 승부. 진정한 승부와 승자는 바로 내가 결정하는 일. 100점이 아니라면 어떠랴. 과정 속에 진심을 다하고 기쁨을 느꼈다면 이미 난 승자다. 마음을 내려놓으니 학교 공부가 이제 좀 더 즐거워질 듯하다. 쨍한 배움이란 바로 즐거움 아니던가.
오늘은 초록햇살 선명한 메타버스 잔디밭에서 막걸리라도 한잔 해야겠다. 과제 제출 한 과목이 남아있지만 이미 중간고사 시즌은 마무리 수순이다. 당연한 국룰 전통에 따라, 잔디밭에 앉아 기타 치며 막걸리 한잔함이 시험 끝난 대학생의 낭만이고 특권이로다. 시험 끝난 학우들아. 모여라. 대동단결 강강술래 하며 한잔하자.
바이어들아 너희들도 와라. 대한민국의 제품은 상품만이 아니다. 최고의 걸작품은 바로 한국인이란다.
오늘은, 100점 맞은 내가 쏜다. 100점이 수십 명이라면 최고 연장자가 쏘기로 하고. 분명 나겠지?
이 소식을 아들과 딸에게 전한다. 백점 만점에 백점짜리 아빠란다.
작고 소소한 일이다만, 아빠의 어깨가 천정에 걸린다. 감사한 날이다. 고마운 날이다.
그런데 왜 눈물이 나려하지? 하여튼 주책도 100점이다.
산다는 건 순간순간이 근심이고 이따금 버겁지만
드물게 행복한 기억으로 거뜬히 나아가는 것
<하루 10분 필림의 손글씨 수업> 작가 : 필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