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날이다.
20대 여자 4명, 30대 남자 2명, 40대 남자 2명, 50대 남자 3명, 사장님 1명, 알바생 1명, 60대로 보이나 얼핏 보면 40대로 보이는 이상한 인간 1명(헤롱이라 부르자). 토요일 오후 다섯 시 현재. 동네 포차 테이블별 인원 구성 현황이다. 총원 14명.
근처 넓은 공원에서는 벚꽃 축제가 한창이지만 이와는 관계없다는 듯, 좁은 포차 구성원들의 수다는 치열하고 뜨겁다. 압도적 포스, 엄청난 술꾼들이다. 초저녁 햇살은 창문 비스듬히 누워 가게를 데우고 있고, 냉장고에 붙어있는 동양화 속 백학 한 마리가 포차 인간들을 내려다본다.
큰일이다. 헤롱은 긴장한다. 빈 테이블은 단 하나. 다음 손님이 들이닥치면 사장님의 눈총을 받을 타깃 1호니까. 세상에나 매상에나 도움 안 되는 혼술인은 오로지 헤롱뿐이니까. 냉장고 백학만이 이 긴장을 알아봐 주는 듯하니 그나마 정겹다.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헤롱의 양쪽 귀는 모든 테이블에 잔뜩 집중한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이다지도 치열하게 하는가 궁금해하면서도 한편으론 의아하다. 이렇게 타인의 이야기를 궁금해한 적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앞에 놓인 술잔에만 집중하고, 오롯이 나만의 사색을 즐겨왔는데 오늘은 다르다. 헤롱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한다. 낯선 날이다.
삼성애니콜 vs 현대걸리버 무엇이 더 좋았냐. (50대 남성 3명은 옛날 친구들이 분명하다. 패스), 유격 훈련 vs 천리 행군 무엇이 더 힘들고 괴롭냐. (30대 남자 2명은 들으나 마나다. 군대 선임 후임 관계. 패스), 이번 거래에는 서로 이익이 없다는 40대 남자 2명은 낯이 두꺼운 거만 봐도 알겠다. (거래처 갑을 관계다. 패스), 오라버니 알바생이 구워주는 돼지갈비가 제일 맛있다는 (사장님과 알바생의 훈훈한 덕담. 패스).
10분 이내에 파악한 관계 예상은 30분 내내 들어봐도 얼추 들어맞는다. 마치 인디언 추장의 촉처럼 예리하다. 그렇다고 몸을 바짝 들이대며 두 손으로 턱 괴고 경청의 자세로 들어선 안 된다. 그건 초면에 실례이니, 그저 공중에 떠다니는 음성들을 노련한 어부가 척척 낚시질하듯 잡아채 끌어당길 뿐이다. 멀티 스테레오 음향의 다채로운 음역에서도 날렵하게 낚아내고 찰떡같이 알아챈다. 혼자 괜히 흐뭇해한다.
단 한 테이블, 20대 꽃처럼 어여쁜 청춘들의 관계 예상은 실패다. 최고의 음질, 최상의 하이톤이지만 10초 단위로 넘나드는 토픽과 스토리의 맥락을 겨우 이어 잡다가 그만 낚싯줄은 끊기고 일엽편주 전두엽은 풍랑을 만난다. 오늘의 유일한 실패다. 인디언 추장도 노련한 어부도 완벽할 수는 없다.
이때, 다음 손님 1인이 입장한다. 지팡이 보무도 당당한 70대 노장이시다. 뒤이어 50대 여성 3인조가 노장의 꼬리를 문다. 저들의 관계는 아버지와 세 딸인가? 작가와 독자들인가? 무척이나 궁금하지만, 슬슬 자리를 비워줘야 함은 단골의 예의다. 마시던 술은 남기지 말아야 함은 또한 술꾼의 기본이다. 예의와 기본에 충실한 자, 이상한 1인 헤롱은 남은 술을 한숨에 털어 넣는다. 냉기 당당한 이슬 덕에 뱃속은 물론, 뇌세포마저 알싸하다. 알싸한 뇌세포가 알려준다. 포차에는 일상과 삶의 역사가 사시사철 도도히 흐른다고. 게다가 오늘은 이상함을 만났으니 충만한 날이라 말한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쨍한 포차다.
자신에 대한 집중, 자기표현 글쓰기를 통한 자기발견에 주로 에너지를 기울여 온 헤롱의 오늘은 이상하다. 타인의 이야기와 감정에 관심이 가고 오감과 촉각을 곤두세워 집중하는 이 변화는 어디서 온 걸까.
답은 바로 나온다. “자기발견 글쓰기에서 문예적 글쓰기로 넘어가고, 사적 이야기에서 공적 이야기에 관심 두고 쓰게 되는 건 작가로서 당연한 발전단계이며 이를 자기표현 글쓰기에서 문예적 글쓰기로의 전환이라 한다.” 수리수리 문장마법사 교수님의 조곤조곤한 말씀이 전두엽을 스친다. 이상한 오늘의 원천은 역시 배움이다. 늦은 나이지만 배움은 언제나 이렇게 신비롭다. 오호라. 내가 지금 제법 근사한 작가로서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거로구나.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조금은 뻔뻔하게도.
나는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은 걸까? 나의 문예적 글쓰기로 세상에 어떤 글이 태어날까?
오늘은 이상하지만 설레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