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과 빗물사이로 5월은 간다.

by 김호섭

"아버지 저 왔습니다." 아들은 대문을 열고 들어선다.

"비가 이리도 많이 오는데 어쩐 일이냐? 기별도 없이."

아버지는 한쪽 팔로 턱을 괴고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 TV 축구중계를 보시다가 아들 쪽으로 몸을 반쯤 돌리신다. "우리 사이에 기별은 무슨 요. 아버지 뵙고 싶어 왔지요." 평생 몇 마디 말 안 하던 부자간에 순식간에 몇 마디가 오고 간다.


아버지는 몸을 일으켜 아들의 안색부터 살핀다. "무슨 일 있는 거냐? 니 엄니 다시 아프신 거냐?" 당장 당신의 아내가 걱정되시는 마음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한 달달 로맨스. 달콩 사랑의 부부의 마음이시다. 아들은 조심스레 말한다. "식사 잘 드시고 잘 주무시고 여전히 목소리 쩌렁쩌렁하신데요. 한 가지 걱정은 청력이 약해지신 건지 가끔 경로당 친구분들 말을 못 알아 들으시는 것 같아요. 경로당 총무님이 저한테 슬쩍 귀띔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소곤소곤 말씀드리는 건, 또 기가 막히게 잘 알아들으시니 괜찮으신 건지 어떠신 건지 잘 모르겠어요." 아들은 방구석 한켠에 앉으며 우선의 걱정을 말씀드린다.


"흠... 당장 어디 잘하는 이비인후과 모시고 가서 검사받아 보거라. 보청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너야 표정만 봐도 무슨 말하는지 감잡는 네 엄마이니 판단기준에서 제외하고." 역시 명쾌하시다. "네. 그리 하겠습니다."




그러곤 흐른다. 깊은 침묵 또는 과묵.

너. 무슨 일 있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너. 요즘 아주 눈물바람이라며? 네. 아버지...

침묵은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깊은 강이 되어 흐른다. 서로 간에 익숙하니 서로 간에 기다린다.

흐르는 시간 속에 알게 될 일이니.

아버지가 먼저 말문을 트신다. 힘들면 힘들다 말해라. 속으로 썩히지 말고. 글 쓴다더니 잘 안 되냐? 역시 나의 아버지시다. 다 보고 다 알고 계시다. 네. 쓰는 일이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해서요.

쓰는 일이 당연히 힘들겠지. 너 자신을 쓰고 세상과 인간을 두루 깊이 관찰해야 하고 통찰해야 하니 얼마나 깊은 사유가 필요하겠느냐. 당연한 일이다. 힘들고 혼란이 올 때는 무엇을 쓰고 어떻게 써야 하는가 보다 왜 쓰는가부터 돌아볼 일이지. 너의 첫 마음. 즐거우니 쓰겠다던 그 말. 작년 추석 때 나한테 말한 그 마음 잊거나 놓친 것이냐? 그런 것 같아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어느 때부턴가 욕심이 나고 혼란이 오고 몸은 앞뒤로 흔들리고 마음은 위아래로 널을 뛰며 약해집니다.


침묵의 강은 다시 바다로 흐른다.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는 아버지. 내가 축구선수 출신이라 작가의 세계는 잘 모르겠다만, 욕심을 비워라. 그저 마냥 쉬운 일이 한번에 이뤄지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 네가 선택하고 결정한 길. 그 길의 무게를 견딜 각오는 어느 일에서나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너의 능력치에서 혼신을 다하는 것. 후회 없이 감당해 내는 일. 너 자신을 믿고 즐기면 되는 일.... 과한 마음은 욕심이니 거기에서 불안이 싹 트고 고통이 일어난다. 더는 해줄 말이 없구나. 답은 언제나 네 안에 있으니 네 마음 잘 들여다보고 살피거라. 네. 잘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너. 사업하다 진 빚. 수억 원이나 된다던 그 빚은 어찌 되었느냐. 네. 어렵사리 갚아가고 있고 내년 이맘때쯤이면 다 정리될 듯합니다. 고생이 많다. 너의 오십 대를 온통 쏟아부었구나. 인생 수업료 크게 냈다 생각하고 너무 위축되지 말거라. 가슴 딱 피고. 네. 아버지. 그럼 저 이만 가볼께요. 너. 아픈 거는? 이제 괜찮냐? 아버지의 걱정이 계속 이어진다. 사는 게 별게 아니다. 마음을 비우고 사랑을 나누고 또 행하여 그 기억을 세상에 남기면 되는 일이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네가 사는 세상에.

그리고. 너. 내가 너에게 맡긴 인생 과제. 잘 수행하고는 있는 거냐? 어머니 평안하신 지 자주 들여다보고, 가족들 두루 건사하고 살펴야 하는 일. 잘하고 있는 거냐? 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잊지않고 명심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술은? 담배는? 아버지의 말씀이 계속 이어진다. 아버지. 저 아버지 보다 이제 더 나이 먹어 올해 예순이에요. 아버지 보다 세 살 더 많으니 이제 걱정 그만하시고 잔소리도 그만하시고요. 말씀 없으시던 양반이 오늘은 웬일이시래요? 그 정도는 이제 저도 아는 나이입니다. 찬찬히 귀 기울여 말씀 듣다가 '술과 담배'에 아들은 괜히 툴툴거리며 일어선다.


짐을 정리하고 방문을 열고 대문을 나서 산을 내려가는 아들을 아버지가 불러 세우신다. 호섭아. 난 네가 내 아들이라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돈 많은 부자나 권세 높고 힘 있는 유명인이 아니더라도, 그저 엎어지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려 애쓰는 오뚝이 같은 그 마음. 꾸준히 배우고,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내 아들.

참 아버지도 별 말씀을 다하세요. 이번 추석땐 늦지 않게 오겠습니다. 바쁜데 뭘 자꾸와. 난 네 곁에 늘 있으니 바쁜데 자꾸 오려 애쓰지 말거라. 아들은 붉어진 눈가를 혹여나 아버지께 들킬세라 서둘러 산을 내려간다. 아버지는 아들의 젖은 어깨와 등, 흙투성이 손을 말리고 씻으시려는 듯. 그윽한 시선으로 아들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데우신다. 햇살처럼 따사롭다.




[하늘의 문]

아버지가 모셔계신 천주교 묘원 주차장.

본인처럼 늙은 차 안에서 아들은 한참을 앉아있다.

아버지는 한마디 말씀도, 한 번의 헛기침도 없으셨지만

깊은 사랑과 용기를 선물 받은 아들은 다시 생각해 본다.

비 오는 날 아버지 뵈러 오길 참 잘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흐르는 이 마음은

아버지도 모르실 테니...


뿌예진 시야를 윈도브러시와 휴지로 연신 닦아내며,

차에 앉은 지 삼십 분이 지나서야 아들은 겨우 시동을 건다.

이제 가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내가 아껴야 할 세상 속으로.

다시 쓰자. 기꺼이. 다시 처음 말하고 쓰는 사람처럼.

한껏 웃자. 고만 울고. 아버지의 말씀처럼.


햇살로 시작한 5월이 이렇게 빗물로 갑니다.

곧 6월입니다.

올여름도 그곳에서 평안하소서.


안드레아.

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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