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아이니는 팅부동이다.

by 김호섭

아는 사람에게 만 보인다는 왕좌의 계단. 인천 차이나 타운에서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언덕에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려져 있다.



청년 세 명이 어영부영 서있더니, 지나가는 소년에게 말을 건다. "어쩌구 저쩌구" 중국말이다.

'사진 찍어달라는 얘기겠지.' 관광지 근처에 사는 주민으로서 이 정도는 쿵하면 짝이다.

독심술이라는 초능력을 굳이 쓰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소년은 손에 들고 있던 CU 아이스 헤이즐럿맛 향긋커피를 잠시 내려놓는다. 이 땡볕 더위에 커피가 밍밍하게 식을까 봐 걱정이 되지만, 본인이야 말로 오리지널

토박이 인천의 아들이자 스스로 임명한 인천의 홍보대사 아닌가. 관광객들이 친절한 소년에 감동받아 또 놀러 올 것 아닌가. 그래야 또 와서 먹고 자고 마시고 돈들 쓸 거 아닌가. 이 작은 친절이 국가와 서민 경제에 이바지를 하는 일이니, 먼지 같은 액션이라도 당장 행해야 마땅하지 말이다.


청년들이 휴대폰을 건네고 자리를 잡는다. 왕좌에 앉으려 서로 싸운다.

"헤이 헤이. 부. 부" 소년은 청년들에게 싸우지 말고 차례차례 한 번씩 앉아서 찍으라고 친절하게 안내한다.

청년들은 헤벌쩍 웃으며 포즈를 취한다.

"하올러 하올러. 이. 얼. 싼" 찰칵-찰칵-찰칵! 오호라. 이 소년 중국말도 제법 할 줄 안다. 청년들이 고맙다며 중국 어디서 왔냐고 물어본다. "웨이하이? 뗀진? 샹하이? 칭따오?" 이어서 다시 뭐라 뭐라 한다.

칭따오엔 양꼬치라고 대답하려다가 어라? 물음표가 먼저 떠오른다.


소년을 중국 사람으로 보나보다.

아니. 누가 봐도 누난 내여자니까의 이승기 닮은 토종 한국인 나를... 뭐 이런 간짜장 같은 경우가.

소년은 양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머리를 45도 각도 좌우로 흔들하는 갸우뚱 초식을 구사한다.

슬슬 준비한다. 대화를 마쳐야 할 시간이다. 더 길어지면 곤란하니까.


"팅부동 팅부동. 완쓰 한궈러" (몰라 몰라. 나 한국사람이야 -> 이보게 청년들. 내가 대한민국이라네.)

청년들은 (어딜 봐도 중국사람처럼 생겼구먼...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며) 그제서야 물서 선다.

"?! 오잉? 아이야..."


소년은 청년들에게 한 손 높이 살랑살랑 흔들고는 그럼 이만 인사하며 쿨하게 왕좌의 계단에 오른다.

"짜이쩬~"

완벽한 대화였다.



이 정도면 글로벌 동시통역 비언어 커뮤니케이션계의 1타 유단자 급이다. (1 년 반 가까이 중국에 가서 사업을 한 바 있으나, 아는 중국어가 이게 전부다. 조선족 통역이 김민재급 밀착마크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바람에 말 할 기회를 원천징수 당했다. 화장실도 따라다닐 정도다. 대륙의 쾌남아들이라며 통 크게 호탕거리다가도, 새털 같은 의심이 든다 싶으면 얌생이처럼 감시자를 붙여서 사업 파트너를 적으로 돌려 버린다. 경험상, 중국은 아주 무서운 나라다.)


왕좌의 계단에 오르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구사할 수 있는 중국어 몇 마디가 더 있다.

"부팡 상차이!" 중국음식, 특히 고기의 누린내를 없애기 위해 많이 사용하는 향신료. 고수. "제발 고수는 빼주세요. ㅠㅠ"라는 말이 "부팡 상차이"다. 생존형 생계형 카테고리의 가장 위에 있는 문장이다. "씨 쇼우 지엔 짜이날? -> 화장실 어디 있어요?" "피앤이 디에 바 -> 깎아 주세요."처럼.

수 십 년간 글로벌 비즈니스를 담당해 온 직장인 나부랭이로서, 5대양 6대주 지구촌을 싸돌아다니며 온갖 음식을 먹어봤지만 이 고수의 벽은 넘질 못했다. 그래서 중국의 만리장성이 그렇게 높은 걸까? 그렇다고 위축되어 식사자리 때마다 소심하게 작은 목소리로 '부팡샹차이' 속삭이지 않는다. 소년은 본인의 가장 큰 데시벨로 호탕하게 외친다. "뿌퐝 샹챠이!!! 음 화화화화화" 마치 돌격앞으로를 외치는 턱수염 그윽한 장군처럼. 마치 만주벌판을 휘달리는 광개토대왕처럼. 우리 모두가 대한민국인 것 처럼.


소년은 혼자만의 너스레를 떨다가 높고 버거운 계단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왕좌의 계단을 넘어서면 기암괴석의 장가계 계단, 그 위에는 만리장성의 기나긴 계단이 줄지어 나타난다. 저 만리장성 계단을 넘으면 소년의 놀이터 자유공원이다. 공원 위로 오르면 비로소 천국의 계단이려나?

그곳에 오르면 사랑은 돌아오려나? 권상우 최지우처럼.


고만하자. 뜬금없다. 맥락없다. 부질없다.

소통이란 무엇이고 누구를 위한 일인가. 나는 세상과 잘 소통하고 있는가. 안으로의 소통은 어떠한가.

문장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계단의 끝에서 무엇을 보고 싶은가.


오늘의 언어도 문장도 왕좌의 계단도

어제의 워아이니도 팅부동이다.

두 번 반복해야 제맛이다. 팅부동 팅부동.


아이스커피가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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