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봐야 할 두 사람

by 김호섭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인천의 명문고. 제물포 고등학교 음악실. 건물 1층과 2층을 터서 계단식으로 넓힌 공간. 한 소년이 혼자 서서 노래를 부른다. <비목>이다. 노래가 끝나자, 선생님은 오르간을 멈추고 말씀하신다. "신은 공평하다는 말이 떠오르는구나. 너는 공부도, 운동도 잘하지만, 노래는 좀..." 소년은 잠시 얼굴이 빨개졌지만, 다시 힘차게 노래 부른다. 다음 곡은 친구들과 손잡고 부르는 합창이다.

Caro mio ben credimi almen,
까로 미오 벤 크레 디미 알멘
Senza di te languisce il cor.
센차 디 테 랑~ 귀 세일르 코~르
Caro mio ben, senza di te languisce il cor
까로 미오 벤 센차 디 테 랑 귀~ 셰일코~~르

소년들은 목청껏 노래 부른다. 이탈리아 가곡 <까로 미오 벤>. 노래는 야트막한 뒷동산을 타고 벽돌담을 넘어 바로 옆에 위치한 (역시, 인천의 명문고) 인일여고 교실로 날아가 소녀들의 귓전을 아련히 울린다.

음악 시간이 끝나고, 다음은 체육 시간이다. 반 대항 축구 시합이다. 소년은 노래는 못해도 축구는 부동의

스트라이커. 발군의 테크니션이다. 운동장으로 신나게 뛰어나가다 문득, 누군가 등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을 느낀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운동장 한 편의 큰 느티나무 아래서 한 아저씨가 미소 지으며 서 있다. "반갑다. 난 40여 년 후의 너란다. 오래간만이다. 많이 보고 싶었어."
17세 소년과 60세 소년이 만나는 기가 막힌 순간이다. 17세 소년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말한다. "언젠가 만날 줄 알았어요. 반가워요. 나의 아저씨." 오히려 놀란 건 60세 소년이다.
"역시, 학교 도서관의 수많은 책 속에 파묻혀 살더니만 상상력, 판타지력, SF력, 예지력이 풍부하구나. 저 눈동자 초롱명랑한 것 좀 보소."

"뭐 좀 물어봐도 돼요?"
"그래. 무엇이 궁금하냐?"
"아저씨. 국어 선생님이나 작가님이 되었나요? 중학생 때부터 꿔온 꿈. 아시죠?" 아저씨는 고개를 떨구고 말이 없다. 대충, 눈치챈 소년은 다시 묻는다."에휴. 잘 안 됐나 보군요. 그럼 돈 많이 번 부자가 되었나요? 가난은 면했나요? 이 땅의 민주주의는 좀 나아졌나요?" 아저씨는 여전히 말없이 먼 하늘만 쳐다본다.

"(나와 내 조국의 미래가 별로 신통치 않은가 보군) 아저씨…. 할아버진가? 아무튼,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뭘 어떻게 하면 국어 선생님이나 작가님이 될 수 있나요?" 아저씨는 한참을 망설인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으나 고민을 많이 하는 듯싶다. "호섭아..." 아저씨가 무거운 입을 뗀다.

"지금처럼 공부 열심히 하고 책 많이 읽고 친구들과 축구도 신나게 하고…. 새벽을 거닐고 문장 속에 노닐 거라. 그러면 된다. 너의 앞길에 여러 갈림길과 고난의 길이 나올 테지만 어떤 길이든 스스로를 믿고 선택하고 부지런히 걸으면 된다. 인간에 대한 사랑. 잊지 말고. 어떤 길로 들어서던지 넌 예정된 미래로 오게 될 테니." 소년은 실망하는 빛이 역력하다. 뜬구름 같은 소리 말고 더 구체적인 얘기를 듣고 싶다고 말하려는데 친구들이 부른다. 어서 오라고. "이제 가봐야 해요. 오늘 반가웠고요. 아저씨도 건강 잘 챙기시고 잘 지내세요. 다음엔 제가 만나러 갈 테니."


17세 소년과 60세 소년이 척척 악수한다. 그 순간, 느티나무 잎새에 한 줄기 바람이 스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바람 기차이려나. 기차 안에서 흐르는 눈물 속에는 17세의 나에게 보내는 미안함과 뭐라 표현하기 어렵고 복잡한 회한이 가득 차오른다. "밥이라도 한 끼 먹이고 올걸..."

기차는 속절없이 어둠을 달린다. 방구석으로.




<돈의 속성>, <사장학 개론>으로 유명한 김승호 회장님의 동영상 Clip을 며칠 전에 보았다.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확인받으려고 눈치 보지 말아라. 딱 두 사람의 눈치만 봐라. 15살의 나, 65살의 나.

내가 청춘 시절에 꿈꿔왔던 사람이 지금의 나인가. 은퇴하고 돌아보니 괜찮은 사람으로서 삶을 잘 꾸려왔는가. 이 두 사람의 눈치만 보면 된다.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제대로 근사한 일이다. 그러면 된다고 본다."

귀한 말씀이나 문장을 접하면 마음에만 담을 일이 아니다. 마땅히 실행해야 할 일이다. 청춘의 나를 만나고 왔다. 청운의 꿈을 품던 17세 소년을 보고 오니 왜 또 자꾸 눈물이 난다. 이놈의 갱년기...


그나저나, 나의 꿈은 이루어지려나? 국어선생님은 이제 현실적으로 어렵게 되었고, 작가님은 되려나? 발길이 무거워진다. 아차차. 다시 생각해 보니, 작가가 되려는 건 목표이겠다. 작가가 되어서 뭘 하고 싶은지가 꿈이겠지. 난 뭘 하고 싶은가. 청예담(淸詣談). 흔들리고 흐리거나, 쓰리고 아픈 어느 마음들이 문장이라는 장강을 지나 맑고 단아한 이야기에 이르렀으면 좋겠다. 세상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고 남기고 싶다.

은퇴의 시간은 머지않았고 기력은 자꾸 떨어진다. 김승호 회장님 프로필을 보니 헛. 나와 동갑이다. 난 도대체 뭘 하고 살아온 건가. 마음이 무거웠지만 오래 그러진 않는다. 이제는 알겠다. 타인과의 비교는 바보들의 일이고, 최선은 나의 권리이며 결과는 신의 뜻이다. 나는 그저 나의 어제와 비교할 뿐.


많지 않은 시간이지만 적지 않은 시간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오늘도 걷는다.

갱년기에도 쓴다.


꿈을 향해.


한 줄 요약 : 살아가면서 딱 두 사람의 눈치만 보자. 15살의 나, 65살의 나.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제대로 근사한 삶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