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의 산책, 분노의 푸시업

줄기차게 공원에 가는 이유

by 김호섭

담당 의사 : "요즘 어떤 운동 하세요? "

아야 : "공원 산책하고 팔 굽혀 펴기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코로나로 중단됐지만 '어르신 건강 에어로빅 댄스팀'의 막내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담당 의사 : "그 정도 운동으로는 검사별 수치 결과가 이렇게 좋아질 리가 없는데. 혹시 다른 운동이나 따로 드시는 약이 있으신가요?"

아야 : "아니요. 그런 건 없습니다. 수치가 그렇게 좋다면 학계에 보고할 정도인가요?"

담당 의사 : "아니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이 질병이 단기간에 쉽게 회복되는 질환이 아니라서요. 한번 데미지받은 뇌세포는 복구가 안 되고 주변의 이웃 세포들이 대신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대행하는 기능이라 100% 완벽한 회복은 어렵거든요. 아무튼 이렇게 계속 유지하고 건강관리 잘하셔야 합니다! ~"

아야 : "선생님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얼마 전에, 4개월마다 진행하는 인하대병원 정기검진을 다녀왔다.

여러 검사 수치가 아주 좋다는 담당 의사와의 대화를 마치고 나오는 발걸음은 사뭇 깃털처럼 가벼웠다.

뇌졸중(뇌경색)이 온 것은 2017년 11월 초겨울 어느 쌀쌀한 날이었다. 출근길.

평소와 다른 오른쪽 팔다리의 움직임에 전날 과음 탓인가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서둘렀으나 도보 10분 거리의 출근길에 서너 번을 주저앉았고,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현기증은 태어나 처음 느껴본, 말로 표현이 어려운 기분 나쁜 통증이었다. 오른쪽 팔다리가 나의 의지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회사 근처 약국에서 전해준 것은 만병통치약이라는 우황청심환. 그러나 만병을 통치하진 못한다. 별반 소용이 없었다. 휘적휘적 회사에 도착해 글씨를 써보았는데, 아뿔싸, 내 이름 석 자가 써지질 않는다.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팔순 노모와 아이들 얼굴이 떠오르는 동시에 눈물부터 차올랐다.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직감했고 인천 기독병원, 인하대병원의 진단 결과는 역시 뇌졸중 (뇌경색)이었다.

뇌졸중은 기본적으로 심장의 이상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는 의사의 설명이 이어진다. 치열한 생존경쟁, 삶의 현장이었던 지난한 직장인 시절에 얻은 협심증이 문득 떠오르니 스탠스가 박혀있는 심장 한복판을 슬며시 쓰다듬어 본다. MRI로 찍은 뇌 사진 우측 아래에 동그랗게 하얀 공간이 자리했는데 그 이미지는 시리도록 선명해서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 공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학적 진단을 떠나 소멸, 절망 그리고 공허의 기억으로 각인되었다. 나의 뇌 한구석 세포들도 지난한 삶의 고충을 차라리 잊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20여 년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늦은 나이 오십 초반에 뛰어든 개인사업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고행길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중국에 올인했던 사업은 한중 사드 이슈로 한순간에 나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사회주의 통제 국가의 공포 앞에는 거래처와의 탄탄했던 관계도 속수무책이었다.

현지 재고 처리를 급하게 진행하면서 북경과 위해, 청도, 하얼빈 그해 겨울 극강의 추위 속에서 온 거래처를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니며 고생할 때도 좌절하지 않았고, 빈손과 엄청난 부채를 안고 한국으로 돌아온 인천공항에서도 끝끝내 울지 않았으나, 결국 이어진 것은 아내의 이혼 통보. (그녀도 많이 힘들었으리라. 이 모든 게 다 내 탓이겠다) 마음은 무너졌고, 그렇게 내 인생도 무너졌다.

2017년 5월. 그 찬란한 햇살의 계절은 역설적으로 시련의 계절을 예고했으며 그 과정과 시간은 참담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 모든 삶과 꿈과 노력이 한 낫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상실감이 끝도 없이 괴롭혔으며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뇌의 한 부분에 켜켜이 쌓여 그 고통의 흔적이 하얀 공간으로 자리 잡아가게 된 것이었으리라.



약 한 달간의 병원 생활을 접고 얼추 회복, 퇴원한 후에는 다니던 회사마저 그만두게 되었다. 아픈 사람에게 일을 맡길 회사는 없었다. 서너 평짜리 허름한 월세 18만 원짜리 인천 최저가 여관방 (전문용어로 '장기방' '벌방'이라 부른다). 급전직하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진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그곳에서의 상당 기간의 생활은 진공상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절망과 포기의 시공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장대비 쏟아지던 여름날, 딸과의 통화 중에 그만 주체할 길 없이 눈물을 쏟고 말았다.

이제 다 잊고, 무거운 짐 다 내려놓고, 오롯이 아빠의 삶을 살아가라는 딸은 오히려 울지 않았고 차분했다. 아들의 세심하고 든든한 응원도 이어졌다. 참고 참았던 아픔의 눈물과 딸의 위로, 아들이 주는 용기는 결국 재기의 촛불이자 기나긴 터널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주었다.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나로 인해 더 아파해온 가족과 우리 아이들에게 더 이상의 아픔은 주지 말자는 견고한 다짐은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교두보였다. 상실과 아픔의 시공간에 더 이상 나를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지 않은가.

대략 오십여 가지의 험하고 다채로운 알바를 경험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무려 천여 곳의 기업에 입사 지원을 하면서 재기의 노력을 이어갔다. 나이 많고 아픈 독거 아저씨를 뽑아줄 회사는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한국에 코로나 1호 환자가 발생하기 바로 일주일 전에 운 좋게도 한 중소기업에서 다시 일할 기회를 잡게 되어 해외사업을 맡아 하고 있다. 포기하지 않았던 도전이 있었고 운이 따라 준 것이며 그 중심에는 가족이 있었다. 참으로 미안하고 소중하고 고마운 일이다.




오늘도 여전히.

동네 공원 (인천 자유공원)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줄기차게 올라간다. 어느새 6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공원 터줏대감 어르신 산책러들에게 안면을 트게 되면서 말 없는 아저씨, 꾸준한 아저씨로 통하게 되었다. 출퇴근 전후 시간을 활용하여 하루에 3시간 30분 정도 산책하고 있는데 그러면 하루 평균 만오천보 정도 걷게 된다. 말이 산책이지 일명 "필사의 산책"이다.

팔굽혀펴기도 초기에는 하루에 20개도 벅찼지만, 지금은 하루에 500개도 거뜬히 소화한다. 하프 형태이지만 일명 "분노의 푸쉬업"이다.

가슴에 하나 걸고 가는 글귀가 있다.

"매서운 바람과 차가운 비도 둥지의 재료이다."

-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 중에서


이 산책과 푸시업은 계속될 것이다.

모든 걸 내려놓고서 말이다.

그 길 위에서

오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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