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의 쓸모 (2)

by 김호섭

진땀을 흘린다. 며칠 전부터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면서, 창밖은 한결 시원 선선한데 웬 진땀인가. 갱년기 탓도 있겠지만, 하루 중에 유난히 진땀을 많이 흘리는 시간이 있다. 하루 1시간 정도. 오후 8시에서 9시 사이. 왼손으로 필사하는 시간이다. 오늘이 열흘째다.




첫날, 문구점에서 사 온 네모 칸 노트의 간격은 3mm 초격자 노트였다. 왼손 필사의 초절정 고수 @희수공원 작가님의 노트가 3mm 정도의 네모 칸 노트인 걸 감지한 따라쟁이는 망설임 없이 고르고 구매한다. 방구석에 와서 막상 써 보려 하자, "아차차!" 판단의 오류였음을 바로 직감한다. 초격자 네모 칸에는 왼손의 펜으로는 점 하나도 찍을 수 없겠다. 걷지도 못하는 아기가 쏘니의 쾌속 질주를 따라 하려는 꼴이다. 바로 유턴하여 문구점으로 아장아장 기어간다. "사장님, 바꿔주세요. 초등학생 1학년 용 한글 연습 공책. 네모 칸 큼지막한 걸로요." "이런 거 찾으시는 거죠? 요즘은 아마 서너 살 아가들이 쓸걸요?" 사장님이 귀찮은 듯 말하며 바꿔준다.




어떤 책을 필사할지, 고민은 1분이 채 안 걸렸다. 수년간 귀한 문장들을 오른손 필사를 해오면서, 언젠가 김훈 선생님의 책을 해봐야지 미리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2019년 선생님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

오랜만의 기가 막힌 선택이라며 혼자 감탄한다. 자. 이제 써보자.

비 맞은 지렁이가 험난한 차도로 퉁 튕겨 나와 흐느적 걸어가듯, 실망과 한숨이 깍두기처럼 생긴 네모 칸을 제멋대로 산책한다. 김훈 선생님께, 그 귀한 문장께 죄송한 마음이 한가득 밀려온다. 이럴려고 선생님의 문장을 아껴온 건 아닌데.


장탄식을 거듭하면서도 네모 칸의 세상에 나만의 글씨를 계속 쓴다. 묘하다. 손가락 마디마디 쥐 나고 진땀 나지만 모든 세포와 신경이 몰입된다. 잡생각이 없어지고 쓸데없는 걱정도 잊는다. 모기가 와서 따끔 물어도 그냥 놔둘 정도다. 모기도 놀랄 정도로 집중하고 쓴다는 얘기다. 쓴다기보다는 그린다에 가깝다. 열흘이 지났다. 지렁이가 제법 각 잡힌 깍두기를 그려낸다.



6년 전, 큰 병으로 오른쪽 팔과 다리가 제 기능을 못 할 때가 있었다. 뇌졸중이다. 병원 침상에서 작은 노트에, 마구 흔들리던 오른손으로 썼다. 이렇게 허망하게 소멸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을까. 딱 세 글자만 썼다.

밤낮으로 썼다. 내 이름 석 자. 글자의 모양은 재활의 시간을 더해가며 옛 모습을 찾아간다.

지금의 왼손 필사가 6년 전 오른손으로 쓴 내 이름 석 자와 닮아있다. 진땀도 역시 다시 만난다. 방구석에 강처럼 흐른다. (반갑다. 진땀아)


하지만, 그때의 진땀이 국가대표 축구 한일전처럼 세상 진땀 나는 승부였다면, 오늘의 진땀은 친선경기나 올스타전처럼 웃고 뛰노는 나와의 경기다. 나와의 게임은 더 멋지거나 예쁘게 쓰는 승부의 의미가 아니다.

흘린 땀이 어떤 땀인가로 결정된다.


나만의 사전에 "진땀"이라는 단어를 재정의해 본다.

[네이버 국어사전] 진땀 : 몹시 애쓰거나 힘들 때 흐르는 끈끈한 땀.

[나만의 국어사전] 진땀 : 진짜로 즐거워서 흐르는 단아하거나 재밌는 땀.


그 진땀으로, 네모 칸을 벗어나 무한 광야에서 신나게 뛰어놀 나의 왼손 필사를 상상해 본다. 그렇게 왼손필사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탄생한 문장들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보고 싶고 맞이하고 싶다.


오늘도 흐른다. 진땀.

재밌고 깊은 몰입.

나의 진땀이다.


한 줄 요약 : 몰입하는 진땀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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