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메모지에 써본다. 왼손에 펜을 잡고 부들거리며 써 본 글씨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다. 아무리 왼손이라 해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악필도 어느 정도가 있을 텐데.
미약한 시작은 그렇게 나에게 왔다. 왼손의 쓸모? 깊이 고민해 본 적 없던 생각을, 어느 날 불쑥하다 보면 그만큼이나 흠칫 놀라곤 하는 날이 있다. 2023년 9월 6일이다.
왼손 필사를 시작했다. 글쓰기 모임 라라크루에서 만난 @희수공원 작가님께서 2년이 넘도록 써온 왼손 필사 작품을 보고 감탄했다. 3mm 네모 칸에 그보다 더 작아 보이는 빽빽한 글자들. 정갈하고 단아한 글씨체가 왼손 필사라니. 세상에 숨은 고수들이 많다 하지만, 이런 초능력 도사님들을 만나면 그저 감탄하고 또 감탄한다.
오른손잡이로서 살아오면서 왼손은 그냥 거들뿐, 왼손의 쓸모를 생각해 보거나 쓸모 있게 단련해 봐야지 계획해 본 적이 없다. 얘를 어디에 써먹지? 나이만큼이나 늙은 왼손을 물끄러미 애처롭게 쳐다보는데, 위로 아래로 좌로 우로 키보드 위를 내 달리며 지금 이 <왼손의 쓸모>라는 글을 두드리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 이거 좀 보라는 듯 현란하다. 그랬다. 왼손은 무려 34년이라는 먹먹한 세월을 묵묵하게 버티며 나의 고색창연한 직장인 나부랭이 경력에 소리 소문 없이 일조하고 있던 것이다. 34년 전의 첫 시작은 미약했겠지만, 키보드를 익혀가며 머나먼 세월의 강을 건너왔기에 지금처럼 (거의) 오타 제로의 단계에 이르렀으리라.
줄줄줄 쳐나가는 스트로크는 현란하니 테니스의 고수 라파엘 나달의 기량과, 치고 달리기 치달의 대명사 차두리의 질주를 닮아 있다. 몸에 익숙하니, 모르고 있던 어떤 쓸모이고 능력이라 할 수 있으려나?
능력? 이라기보다는, 켜켜이 먼지처럼 쌓인 시간의 힘이 빚은 생계형 손부림이 맞겠다.
7월 어느 날, 고수리 교수님의 <여행의 장면> 북토크를 다녀와서 후기 비슷하게 쓴 글을 다시 본다.
"여행은 낯섦. 일상은 익숙함. 낯섦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 익숙함을 낯설게 만드는 것. 이것이 새로움의 정의라 했던가? 익숙함과 낯섦이 만나는 지점이 새로움의 출발이라 했던가?"
왼손으로 글씨 쓰기! 새로움을 찾아 여행을 떠나보자.
갱년기라는 헛헛한 마음에서 벗어나 보자. 집중과 몰입의 힘으로.
이지불이(理智不二). 이치와 지혜는 둘이 아니라 하듯, 왼손과 오른손이 둘이 아니다.
둘 다 나에 속해 있으니, 원래의 하나로 모으는 일. 스님의 합장처럼,
자꾸만 갈라지는 내 마음의 갈래를 하나로 모아 사랑으로 축원하는 일. 수녀님의 기도처럼.
참. 말 많다. 그냥 해보자.
명분과 뜻을 세웠으니 이제 남은 건 실행뿐. 책상머리에 앉아본다. 하루 30분. 단지 5일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쥐 난다. 각자, 각 손가락마다 담당하고 맡은 지정된 키보드만 휘뚜루마뚜루 두드리면 되었던 키보드 스트로크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다. 펜을 붙잡는 그립력, 엄지 검지 중지의 기가 막힌 삼각 구도. 나머지 두 손가락의 견고한 뒷받침. 다섯 손가락의 유연한 이동성. 아이고. 이 동작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버금가는 협주 하모니 따따블 앙상블이다. 30여 년을 각개전투에만 집중하며 따로 놀던 손가락들이 감당해 낼 차원이 아니다. 희수 작가님의 초능력을, 아니, 2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과 인내의 힘을 도저히 가늠할 수없다.
오른손을 미러링 해서 똑같이 따라 해 봐도 어김없이 삐뚤빼뚤이다. 유심히 살펴보니, 오른손은 손가락을 잡아당기며 쓰는 동작의 패턴인데, 왼손도 마찬가지모습으로 당기면 도저히 답이 안 보인다.
밀어볼까? 몸으로 밀고 나가는 느낌으로 연필로 글을 쓰신다는 김 훈 선생님처럼? 밀어보니 영락없는 그림 그리기다. 설렁설렁 될 일이 절대로 아니다.
아무튼, 도전이다. 해보자.
(힘찬 응원과 격려 보내주신 희수작가님 고맙습니다.)
한 줄 요약 : 왼손 필사는 신세계로 떠나는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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