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와 자기표현 (3)

by 김호섭


어반 스케치 교실 두 번째 날이다.

첫날, 자기소개도 했겠다 어느새 구면이 된 학생들과 선생님은 동네 이웃처럼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그렇다고 "오호호. 소실점 아저씨 오셨어요."라고 반기며 맞이하는 여사님은 없다. 세상이 그렇게 나에게 관심이 많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이제 아는 나이다. 그저 가볍게 묵례하고 사뿐사뿐 맨 앞자리에 앉는다.




선생님께서 강의를 시작하신다. "자. 오늘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 볼 텐데요. 그려볼 대상은 나무입니다." 선생님의 이 한마디에 극소수(젊은 층)는 '슬슬 실력 발휘해 볼까나'하는 자신 있는 표정이고 대다수는 웅성웅성 거린다. "아니, 첫날에 선 쭉쭉 그어보고 자기소개한 게 전부인데 벌써 그림을 그린다구요?" 강단 있어 보이는 어느 여사님이 말을 꺼내자, 다시 웅성웅성 이 시작된다.

소년은 독특하게도 중얼중얼하지만, 별반 다름없는 웅성웅성 중의 하나다. "자자. 이번 스케치 교실의 목적이 그림에 대한 관심과 자기표현의 느낌을 알아보는 과정이니, 너무 두려워 말고 일단 막 그려보는게 중요합니다. 오늘은 나무 그리고 다음엔 동네 모습, 마지막 시간엔 답동성당을 그려 볼 겁니다." 선생님의 말씀에 소년은 서둘러 초심을 돌아본다.'그래. 한 달에 네 번 수업받고 무슨 어반드로잉의 고수가 될거냐. 그저, 그리는 마음, 그림으로 나는 어떻게 자기표현을 해볼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면 되겠다.' 목표를 정조준 타겟팅해본다.




강의실 왼쪽에는 대형 유리창. 그 너머엔 아담한 정원이 있으니, 당연히 나무와 바위, 잔디와 풀들이 오밀조밀 모여 살고 있다. 나무 찾으려 어디 멀리 나갈 필요가 없다. 옛날 인천시장의 관사로 쓰인 이 집에서 수십 년 후, 이름 모를 소실점 아저씨가 유리창을 열고 정원에 나선다. 그 옛날 인천시장은 이 사실을 예견이나 했을까? 시간과 공간을 오며가며 상념과 상상에 젖는 건, 아마도 쓰는 자가 되면서

부터다. 쓰는 자 이전엔 먹고 사느라 아무 생각 없었으니.


뒷짐 턱지고 정원을 노닐다가 '아차차. 나무 그려야지' 정신 차리고 보니, 정원에 나선 자는 네버 에버 온리 완. 낡은 아저씨 나 혼자다. 어딜가나 혼자다. (나중에 젊은 커플이 나오긴 했지만).

모두 강의실에서 몸만 구십도 좌로 틀어 앉아 그리고 있다. 날이 흐리고 궂으니, 밖에 나서기에 적절치 않다는 판단일 것이다. 유리창에 비친 나무의모습이 정녕 참모습일까? 괜스레 툴툴거리며 정원 구석 벤치에 앉는다. 찬찬히 둘러보니 단번에 눈에 밟히는 건 소나무다. 굽이굽이 굴곡진 모습. 침엽수이자 상록수인 그가 안고 왔고 또 그렇게 가야 할 태초의 고독. 그래 너로구나. 일필휘지. 익숙한 그

고독을 거침없이 그려본다. 나무를 그리라 했더니 장면에 스토리를 쓰고 있는 화백 하나 나셨다.




스케치하고 강의실로 돌아와 색칠하면서 자기만의 세계에 퐁당 빠져있던 소년은 소통의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고개를 들어 학생들의 그림을 본다. '아니.이건 반칙 아니가요? 나무를 그리라 했는데 배경 하늘에, 담벼락에, 어맛? 마을을 그리다니요.' 참. 나. 원. 사람들이 해도해도 너무하다.

내 그림을 다시 보니 수십 년 전, 국민학생 시절에 소풍 가서 그린 송도 해수욕장 뒷 동산 소나무 하나 갑자기 소환되어 덩그러니 애잔하다.


아이구. 자기소개에 이어 자기표현도 연타석 폭망이려나?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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