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모두가 그림은 처음 그려 본다더니 죄다 반칙왕이다.
하기야, 이 땅에 노래 잘하는 사람도 많고 춤이면 춤, 악기면 악기. 글 잘 쓰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문화강국 우리나라 대한민국!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닐 터이다.
애잔한 소나무를 붙들고 잔뜩 시무룩해져 있는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다."자, 이제 빙 둘러앉아 봅시다. 본인의 그림을 펼쳐 모두에게 보여주고 어떤 그림인지 설명해 봅시다. 설명을 듣고, 모두는 각자의 느낌을 얘기해 보는 시간입니다. 자. 거기, 소실점 아저씨부터."
"아니. 선생님…. 이렇게 깜빡이도 안 켜고 훅 들어오시면 어쩌나요. 자기소개 시간에 저 INFJ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빙 둘러앉으려 자리를 세팅하는 짧은 찰나에, 아무 생각 없던 소년의 전전두엽은 진땀을 흘린다. "음…. 어…. 그러니까…. 저는 소나무를 그렸구요. 나무의 굴곡진 외형과 솔잎, 솔방울을 최대한 운치 있게 그려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소나무에 컵케익이 열려있네요. 그게 먹고 싶었나 봅니다. 그림이 너무 초딩 수준이라 민망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네요." 사람들은 웃고, 소년의 얼굴은 순식간에
불타는 고구마가 되어버렸다. 앉은뱅이책상이라 어디 숨을 곳도 없으니, 급기야 그림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린다. 사람들은 계속 웃는다. "뭘 그리 부끄러워하세요. 정히 그러시면 차라리 눈을 감아요."
선생님은 허허 웃으시더니 "그림에는 그린 자의 심상이 투영됩니다. 나무의 굴곡진 모습에서 소실점 아저씨의 삶도 아주 굴곡지셨나 하는 느낌인데, 그러신가요?"
선생님의 그림 평에 소년의 가슴에서 쿵 소리가 난다. 뭐라 말할지 망설인다.
"그래요. 50대, 60대쯤 되면 누구나 고단한 삶의 애환이 있기 마련이죠. 고단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나요?" 선생님은 70대 중반으로 보인다. 빵모자마저 은은하다. 잔잔한 한두 마디 말씀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물결을 일으키는 연륜. 이것이 어른의 품격일까?
선생님의 말씀 이후에, 내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평이 이어진다.
선이 굵고 호탕하니 시원합니다. 나무껍질의 명암도 선명하니 잘 표현하셨습니다. 뾰족하고 강한솔잎에 본인만의 독특한 개성이 보입니다...
"아니, 저기요. 그저 쓱쓱 그림 그리기 배우러 온 건데, 굴곡진 삶, 고난의 생애, 인생의 명암, 심상과 개성이라니요. 우리 이제 두 번째 만났고 그림 한 점 그렸을 뿐인데..."
어안이 벙벙하다. 지금 이 시간은 마치 글쓰기 모임(라라 크루)의 합평회와 유사하지 않은가.
본인이 쓴 글을 설명하고, 모두의 느낌을 서로 주고받는 시간. 자기를 표현하고 타인의 느낌과 감정, 시선을 함께 들여다보는 시간. 소년은 불타는 부끄러움을 두 손으로 쓱쓱 문질러 끌어내려 익숙함으로 바꿔본다. 사람들의 그림을 보며, 나무 아래 석등 모습이 아기자기해서 작품에 다양성이 풍부하다느니. 몽글몽글 동글동글 따뜻한 느낌이 가득하고, 주변 가지와 잎새를 단순화하고 오로지 나무 본질에 충실한 그림이 참 아름다워 보인다. 등등. 마치 방언 터진 어느 지방 아저씨 마냥 줄줄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작품 평에 열심이다.
"오호, 소실점 아저씨, 그림 보는 눈이 있는데요?" 선생님의 칭찬도 이어진다.
끝으로, "물 위에 이름을 남기듯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던 어여쁜 처자의 순서가 왔다. 다소 먼 거리라 그런지, 노환 때문인지 잘 보이진 않지만, 윗부분 초록 잎들은 풍성하고 선명한데, 아랫부분 바위와 땅 쪽은 희미하다. 자기소개 때 했던 처자의 말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소년은 수년 전 중국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가 공원 바닥에 큰 붓으로 물을 찍어 문장을 써 내려가던 모습이 오버랩된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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