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사의 마침표

by 김호섭


느닷없이 눈물이 나는 때가 있다.


올여름 초엽에 딸이 왔다. 인천 신포동 조그만 카페. 아빠와 딸 외에 다른 손님은 없었고 오후의 햇살이 테이블 위에 놓인 수박 주스와 아메리카노 커피 옆으로 비스듬히 쏟아진다. 딸은 작은 액자 하나를 건넨다.

"아빠, 이번 유럽 여행길에 파리에서 찍은 웨딩사진이야. 현지 스튜디오에서 아직 다 보내 준 건 아니고, 우선 아빠 드리려고 하나 갖고 왔어요."

에펠탑 앞에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배경에 영화의 주인공보다 예쁘고 멋진 딸과 사위가 보인다. 참으로 아름답다. 함박웃음 지으며 한참을 바라보던 아빠의 목울대가 갑자기 덜컥거린다.

급기야 운다. 딸 앞에서.


테이블 위에 뚝뚝 떨어지는 아빠의 눈물은 여름 햇살보다 뜨겁게 차오르니 한번 터진 강둑의 범람을 막을 수 없다. 딸도 놀라고, 아빠도 놀란다. 카운터에서 졸고 있던 사장님은 벌떡 일어나더니 조용히 티슈를 건네고는 주방 안으로 자리를 피해 준다.


아빠는 고민한다. '아빠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 딸에게 얘기하고 잠시 이 난처와 당황을 피해 볼까? 그러다 딸을 봤다. 가뜩이나 동그마한 눈이 크게 동그래져 있다. '지금 자리를 비우면 딸이 더욱 놀라고 당황할 일이다.' 어서 진정하자.


"에휴, 축하하는 사람 하나도 없이 둘이 얼마나 쓸쓸했겠냐..." 하나뿐인 딸내미 결혼식도 못 올려준 못난 아비가 되었다는 자책은 잠시 진정된 마음을 다시 일렁이게 한다.

딸이 아빠의 손을 꼭 잡으며 "아이고, 우리 아빠를 어쩌면 좋아. 결혼식을 못 한 게 아니고 안 한 거야. 우리 충분히 오래 생각한 거예요, 결혼식에 드는 비용과 수고를 생략하고, 여행 가서 보고 싶었던 작가들의 작품도 감상하고, 깊고 의미 있는 추억,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고 갔다 온 여행이에요. 요즘 이렇게 스몰웨딩으로 하는 커플 많아요.

난 아무렇지도 않고 너무너무 행복하기만 한데…. 아빠는 왜 울고 그래."

딸은 차분하고 다정하게 말한다. 뉘 집 딸인지 참 이쁜 새색시다. "그래, 그래. 그럼 된 거다. 고맙다. 고마워 딸아." 아빠와 딸은 두 손을 꼭 맞잡고 다시 함께 웃는다. 테이블 위의 햇살이 뜨거웠던 눈물을 맑게 씻어준다.

딸은 해가 갈수록 당당하고 현명한데, 아빠는 나이 먹을수록 왜 이리도 주책인가.




사위가 사돈어른과 사부인을 모시고 식당 안으로 들어선다. 아빠와 딸은 반갑게 맞이한다. 지난 주말에 상견례가 있었다. 나보다 더 과묵한 사돈, 다정다감한 사부인을 뵙고 식사하면서 '수더분하고 정겨운 분들이시다. (시댁의 의미로) 우리 딸 고생은 시키지 않으시겠다'라는 생각에 이르자, 친정아버지의 마음은 푸근해진다.

교통체증으로 뒤늦게 아들이 도착했다. 할 얘기가 점점 떨어지던 차에 당도한 아들은, 오빠로서 여동생과 재미났던 옛이야기와 이런저런 유머로 분위기를 한껏 따스하게 덥힌다.

뉘 집 아들인지 의젓한 녀석이다. 행복하고 훈훈한 시간으로 상견례는 마무리되었다.




귀가하던 차 안, 수도권 제1 순환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아빠는 작년 여름, 아들 결혼식에 준비했던

<아빠의 축사>를 꺼내본다. 결혼식 시간 관계상, 하객들 앞에서 말씀드리지 못했던 축사의 뒷부분, 짧은 글을 다시 떠올려 퇴고하고 이렇게 딸과 사위에게 전한다.


함박눈 같은 오렌지 빛 햇살이 고속도로에 쏟아진다.

아빠는 이제 느닷없이 울지 않는다.

현명한 딸 옆에 듬직한 사위가 있으니.




제목 : <담고 담아 닮아가거라>


우리는 부모님을 닮아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그러하다.

어느새 나도 나의 아버지를 닮아 있구나.

유전자의 힘이겠다만,

누군가를 닮아 간다는 건 누군가를 담는 일이겠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투, 표정, 습관, 익숙한 모습,

즉 삶의 무늬를 얼굴이라는 그릇에 담고 담아 닮아 가는 것이겠다.


유전자만큼이나 큰 힘이 있다. 사랑이겠다.

부부도 닮아간다.

늘 거울을 보자.

나의 표정, 미소, 언어는 살아가는 일상의 습관 속에 나오니

스스로가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아가거라.

그것이 먼저다. 그 노력이 먼저이겠다.

거울을 보며 늘 찬찬히 그 모습을 들여다보거라.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보아라.

배우자에게 비친 모습은 곧 내 모습의 투영이니,

내가 안온하고 사랑이 깊어야 그 모습이 배우자의 얼굴에 비친다.


서로의 거울이 되어라.

서로 그 사랑의 얼굴을 담고 담아 닮아가거라.

나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으로 정성껏 담아가면서

천천히 꾸준히 서로 닮아가거라.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의 힘으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이 시집을 갔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어른이 되었다.


아비는

축사의 마침표를 찍고

이제, 딸의 손을 사위에게 맡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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