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그려보자 (3)

by 김호섭


(선명하게 갈라진 돌담 모퉁이를 돌아서자, 상앗빛 비녀 쪽진 머리 우리 할머니가 "펑" 하고 나타나시더니 달달매콤 맛난 설탕 베이스 떡볶이를 만들어 주신다)




맛의 기억은 어디에 저장되는가. 언제 떠올라 어떻게 재생되는가.

김훈 선생이 답해 주신다.

"맛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의 지층 맨 밑바닥에 숨어 있다가 불현듯 솟아오른다. 지나간 맛을 지나갔다고 해서 부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중략) 아득히 먼 시간의 저쪽에서 내 어머니의 간장 베이스 떡볶이 맛이 살아나서 내 마음을 찔렀다. 그 아픔은 슬픔과 기쁨이 섞인 생의 감각, 즉 융합 고통이었다." - <연필로 쓰기> P181~ P182

떡볶이 하나로 시공간, 감각, 감정과 기억의 경계를 넘나드시니 역시 대가는 대가이시다.


지나간 맛

지나간 마음

지나간 사람


문득, 불현듯 솟아 떠오르는 지나간 어떤 것. 미소 짓는 그리움도 있지만 지우고 비워도 재생되는 아픔도 있으니, 생의 감각이라는 선생의 말씀이 깊게 다가온다.




미래의 손주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한없이 말없는 과묵 9단이지만 불의를 보면 주먹 쥐고 일어서는

공동체를 저버리는 이상한 인간들이 뉴스에 나오면 TV를 발로 차서 내다 버리는

동네 고양이들의 재롱에 미소 짓고

폭풍우 속에서도 신나게 춤추며

한잔의 노을 주에 불타는 고구마가 되거나

조막손 꽃단풍 곁을 맴맴 돌며

높은 가을하늘에 취해 어깨춤을 추다가도

느닷없이 주르륵 눈물짓는

사랑과 낭만 가득한 할아버지로 기억되면 좋겠다.


이 땅의 수많은 출판사 어디에서도 연락은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며, 그러면 된거라며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새벽 5시를 마감 시간이라 스스로 정하여

삶이 한 권의 책이려니,

묵묵히 생의 기록을 매일 퇴고해야 한다며

괜히 혼자, 좁은 방구석에서 백 미터 달리기 하듯

이리저리 뛰어다니거나 계단에서 떼구루루 구르는

좀 이상하거나 재미난데 귀여운 할아버지로 추억된다면 좋겠다.

욕심이 과하다.


그저, 새벽을 거닐고 문장을 노닐며 그리면서 그립다고 말하는,

하루치의 맛을 굽고 끓이고 요리조리 데쳐 오롯이 즐길 줄 아는

멋진 할아버지로 불현듯 떠올랐으면 좋겠다.




한옥 카페 앞에서 소년의 할머니를 그려보았다.

여전히 초딩 수준의 그림이지만, 첫 작품치고는 제법 근사하다며

"오호호호" 우리 할머니처럼 웃는다.


이번 주말엔 떡볶이를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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