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과 소년은 소실점을 향해 나란히 서 있다.
하늘은 회색빛으로 물들었고, 으슬으슬한 초겨울의 냉기가 동네 골목마다 가득하다. 두 남자의 시선은, 마치 주홍빛 레이저 광선처럼 골목의 냉기를 가열차게 뚫고 쭉쭉 뻗어나가 한 점에 모여 불타 오른다.
"이봐요. 소실점 아저씨, 저기가 소실점이요. 그런데 당신과 내가 바라보는 소실점은 약간의 차이가 있을 거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선생님?" 호기심 많은 소년이 묻자, 선생님이 살짝 미소 지으신다.
"소실점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눈높이. 어떤 복잡한 피사체나 장면이나 풍경이든 언제나 시선의 중심은 나.
내 눈의 높이. 그러하니, 당신의 소실점과 나의 소실점은 당연히 약간의 차이가 있지 않겠어요? 허허허."
"음… 어…아! 헛헛헛." 소년도 따라 웃는다. 웃는 소리가 다소 헛헛하다. 선생님은 180 이 훌쩍 넘는 팔척장신이고 기골이 장대하시다. 소년의 눈높이와 기골은 생략하기로 한다.
선생님은 빛의 명암, 색채의 채도, 밀도.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노하우를 쏟아 내신다. 소년은 알아차린다. 지금 이 순간!
'1대 1 톱클래스 완전 개인레슨 타임이다. 어떻게 이 귀한 순간이 나에게로 왔을까?'
금빛 노하우는 공책에, 선생님의 말씀은 마음속에 스케치한다.
선생님은 2022 우현 예술상에 빛나시는 예술계의 거장이시다.
선생님과 소년은 소실점을 등지고 다시 강의실로 돌아온다. 수강생들은 모두 자신의 그림 그리기에 폭 빠져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이 귀한 순간을. 자리에 앉은 소년은 깊은 호흡을 하면서 삼십 분 전의 장면을 떠올린다.
"선생님께 그림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그림을 그리시는 이유랄까요? 궁금합니다." 선생님은 아련한 눈빛으로, 창문 너머 아담한 정원을 바라보시며 잠시 생각에 잠기신다.
"그림은 나 자신입니다. 피사체에 나를 닮아 화폭에 표현하는 겁니다. 그림 속에 내가 있고, 그리던 그때의 마음, 장소, 날씨, 주변 상황이 모두 담겨 있으니, 단지 한 장의 그림이 아니라 지나간 어느 시간과 그때의 나를 고스란히 볼 수 있게 되죠. 그런 게 너무 좋아서 계속 그린답니다." 이 말씀은 마치 <생에 감사해> 국민 엄마 혜자 선생님의 "연기는 나 자신이에요. 직업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라는 말씀과 나란히 오버랩되어 소실점으로 곧게 향한다.
소년은 그림 붓을 잠시 내려놓고, 예술가로서의 삶과 작품활동, 슬럼프 극복법, 작가로서의 태도와 철학 등등의 질문을 쏟아낸다. '아니 내가 이렇게 적극적인 사람이었나? INFJ라며...' 자신도 놀라운 상황 속에 선생님은 차분하고 친절하게 답해 주신다. 흐린 오후의 강의실 안, 모든 수강생은 그림 그리기에 빠져있고, 선생과 소년은 깊은 대화로 서로에게 스며들고 있으며, 바로 옆자리에 앉은 젊은 처자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턱이 빠져 있다. 아마도 감동에 빠진 듯하다. 선생님은 휴대전화의 사진첩을 열어, 소년과 처자에게 여러 작품을 보여주시며 설명을 이어가신다. 순간, 처자의 눈은 반짝였고, 선생님의 모습에는 해맑은 소년의 모습이 비추인다. 이렇게, 좋아하는 일에 빠져 칠십 평생 가까이 그려온 선생님의 얼굴에는 소년의 모습이, 평생 눈이 부시게 연기를 해오신 혜자 선생님에게는 소녀의 모습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바라보게 된다.
삼십 분 전의 모습이었다. 소년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소실점 아저씨, 나 좀 봅시다." 선생님께서 밖으로 이끄셨고, 함께 흐린 골목길의 소실점을 바라보게 된, [지금, 이 순간!]을 맞이하게 된 사연이다.
어반스케치 4회 강의가 모두 끝났다. 각자 그린 그림을 다듬어 액자에 담아, 소박한 전시회도 한단다. 4개의 반차를 썼고 한 장의 그림을 얻었지만 소중한 시간이었다. 분야와 장르를 떠나 예술하는 마음과 작가의 태도를, 거장의 면모와 수줍어하시는 모습을 통해 잠시 엿볼 수 있는 귀한 순간이었다. 마지막 말씀이 다시 가슴을 쿵 친다. "이 그림은 망쳤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막 덧칠하고 욕심부리지 말고, 시선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려보거나 다른 일을 하다 와서 다시 그림을 보세요. 그럼 보일 겁니다. 어떻게 수정해야 완성도를 높일지, 어떻게 하면 보다 선명한 나를 표현할지. 집착은 무겁습니다. 타인의 인정이나 평판에 휘둘리지 말고 가볍게 그리세요. 여행하듯이. 쓱쓱~"
2023년 근 1년간, 출간이라는 목표 아래 애써온 지난 퇴고의 시간은 애달팠다. 문장은 보이지 않았고, 맥락은 무거운 집착에 가려 잡히질 않았다. 욕심이었다. 그림 그리기를 통해, 나만의 소실점과 그 너머를 보고 왔으니 이제 서랍을 열어 본다. 수많은 출판사에서 거절당해 먼지처럼 쌓인, 불쌍한 나의 원고. 망한 아이들이 소년을 쳐다본다. 처량만강이다. 먼지를 훌훌 털어내고 말간 눈으로 다시 보련다. 2024년에는 좀 더 가볍게 가보자. 쓰는 일이란 살아가는 일. 지금, 이 순간! 살아감에 집중하고, 내 눈높이로. 내 속도로. 입체적으로 일상을 바라보자. 여행하듯이 걸어보자. 툭툭~!
(한 줄 요약) : 집착은 무섭도록 무겁다. 시선을 거두어 창밖을 봐야 할 때가 있다. 길의 끝에서 선명한 소실점을 찾는다. 길의 끝, 소실점에서 거꾸로 가볍게 바라본다. 지금 이 순간의 나를.
그대, 잘 살아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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