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가 되자 회사 일이 바쁘다. 어디 연초뿐이랴. 24 * 7 * 365 "바쁘다 바빠"이지만 이맘때는 더욱더 바빠야만 한다고 누군가 뒤통수에서 채근하는 듯하다.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생략키로 한다. 아무튼, 원래 회사 일은 "바쁘다 바빠"여야 제맛이다. 그래야 차라리 속 편하다. 그렇다고 워커홀릭은 아니다. 설마 그럴 리가.
새해가 밝자마자, 어느덧 35년 차 직장인 나부랭이가 되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과 걱정마저도, 이제는 무념무상의 거대한 하늘 아래 한 조각 떠도는 조각구름일 뿐이다. 출발선도 결승선도 내가 정한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각오는 다소 허세스럽지만, 이제는 공공연히 선언한다. 아마도 쓰는 자가 된 이후에 생겨난 다부진 뻔뻔함이 한몫하고 있으리라. 여전히 묶여있는 직장인이지만 마음만은 훨훨 나는 빠삐용이라는, 고요 속의 외침이리라. 그러니 "나부랭이"라는 표현은 쓰지 말기로 하자. 괜스레 힘 빠지는 단어다. 힘찬 대체어로 바꿔본다. "수출역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장님." 다분히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다. 최소한의 새해 덕담 정도는 오고 가도 좋으련만, 그런 다정다감을 기대하기엔 회사라는 괴상한 공간은 그럴 시간과 여유가 없다.
모닝커피 한잔하기도 전에 와르르 소집된 전 직원 신년 전략회의. 사장님의 매년 똑같은 훈사, 매년 이루지 못하는 사업계획, 아무 말 없는 생산라인 직원들. 공장 위 흐린 하늘만 바라보는 수출역군.
건조한 장면과 시간만 바쁘게 흐른다. 공단의 하늘은 어찌 저리 꾸준히도 실버 그레이일까. 참으로 궁금한 일 중의 하나다.
회의는 회의고,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여러 일들이 몰려온다. 연말연시 느긋하고 기나긴 휴가를 즐기고 돌아온 서구권 바이어들이 왓쓰앱 메신저창에 "왓썹호썹"하며 속속 입장한다. 잘 쉬고 왔냐? "너네는 좋겠다. 길게 푹 쉴 수 있으니." 선진국에 진입했다던 우리는 지금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일도 신경질도 함께 몰려온다.
아저씨는 길고 깊은 복식호흡을 서너 번 하고, 사장님이 막무가내로 수정해 버린 올해 타깃 수출액은 아랑곳하지 않고, 키보드 위를 냅다 질주한다. 새해 첫 타전을 전 세계로 날린다. 농담이, 가족들 근황이, 스몰톡이, 해피뉴이어가 딱딱한 업무 이야기를 앞서 달린다.
어서 오라. 바이어님들아. 지독한 경쟁자들아.
총성 없는 전쟁터. 글로벌 상인들아. 전사들이여.
새해 새 마음으로 어디 한번 붙어보자.
나는야 신라 청해진 무역왕 장보고의 후예.
뜬금포 안 쏘고 진심포만 쏜다는 K-9 자주포.
드라마 미생의 영업 3팀, 장그래의 이성민.
계약서 위의 한 줄의 문장도 수없이 퇴고하며
쓸모없는 걸 쓸모 있게 만드는 문학도.
이 땅의 수출역군이다.
올해도 얼마나 많은 낙담과 좌절, 실망과 속 쓰림이 애간장에 쏟아질지 걱정하진 않는다. 작은 거래, 소소한 친절, 쓰는 말만 우려 쓰는 사골 영어 고리 고리 엮어서 요리조리 붙여서 멋진 진주목걸이 만들어 차근히 근사하게 차고 세계 무대에 나아가면 될 일이다. 큰 거래는 그냥 허투루 오지 않는 법. 그냥 제 발로 걸어오지 않는 법. 1퍼센트의 가능성을 오늘도 붙잡는다.
연초에 싱가포르, 인도바이어가 한국에 들어온단다. 나 보러.
설마 그럴 리가. 어쨌든 어서 오라. 친구들아.
수출역군 아저씨는 새로 열린 길을 다시 걷는다.
수출길도 길이고 인생길도 살아가는 길이니,
출발부터 먼 길 완주하려는 압박감은 무거우니,
그저 오늘 하루하루, 한 번에 한 걸음 걸어가면 될 일이다.
묵묵히 길 위의 문장들 써 내려가듯.
우리 동네 빨간 머리 앤이 말하듯.
"정말로 행복한 나날이란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날이 아니라
진주알들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인 것 같아요. "
하루하루의 빛나는 진주알 고리고리 꿰어봅시다.
우리 모두가 대한민국입니다.
치얼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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