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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섭 Feb 01. 2024

겨울에도 좋을 냉면


"똑똑똑" "누구세요?" 방문을 열어보니 번아웃이 서 있다. 그랬구나. 어쩐지.

"혼자 온 거야?" 소년이 묻자

"아니…. 그게 말이지" 번아웃 뒤에서 무기력이 뒤통수를 긁으며 고개를 내민다.

"그래. 그럼 그렇지. 너희들은 늘 함께 다니더라."




일요일 오전 열한 시. 방문턱을 경계로 첨예한 대치를 펼치다가 소년은 옷가지를 챙겨 입는다.

"아이구 아이구 어휴휴 끙끙" 이건 몸의 소리다.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 하기엔 너무 깊고, 연기라고 하기엔 너무 자연스럽다. 밖을 나선다. 공원에 오르려나? 공원을 지나쳐 홍예문 쪽으로 내려간다. 소방서가 보인다. 도서관에 가려나? 어? 우회전해야 하는데  좌회전한다. 어디 가는 거지?


"철컹철컹" 쇠끼리 부딪치는 치열한 마찰음이 시끄럽다. 화평철교가 보인다. 서울의 한강철교처럼 웅장하고 근사한 철교는 아니고 그냥 조그만 굴다리 철교다. 오호라. 소년은 지금 화평동 냉면 거리로 가고 있는 게로구나. 인천역과 동인천역 사이에 위치한 냉면 골목. 동인천역 4번 출구로 나와 화평철교 지나면 바로 보인다. 수십 년 전통의 냉면집 <할머니냉면>. 세숫대야 냉면으로 유명하다.

 <일미냉면> <아저씨냉면> <왔다 냉면>이 옹기종기 오손도손 모여있다. 옛날에는 정말 냉면으로 세수해도 될 만큼 엄청난 양으로 승부하던 식당들이다.


매해 여름마다 대여섯 번은 오는 식당이지만, 이렇게 번아웃과 무기력에 빠졌을 때도 찾는 단골식당이다. 힐링푸드? 소울푸드라고 하나? 마음 시끄러울 때는 계절과 상관없이 맵고 시원한 냉면이 소년에겐 특효약이다. 한 그릇 포장하여 까만 봉지에 담아 식당을 나서는데

"콰아아아 철컹철컹" 기차가 지나간다.

자유공원 넘어 방구석에서 들으면 "쿠오오오 두구둥 두구둥" 정도로 아련히 낭만스럽지만, 가까이 들으니 소란하고 시끄러운 게 딱 내 마음 같다. 이제는 이렇게 제 마음도 자세히 듣고 상태도 알아차리고 스스로 해법을 찾아 처방하는 소년이 슬쩍 기특해 보인다.




방구석에서 냉면으로 세수하고 육수로 샤워하니 속이 뻥 뚫린다.

정신이 쨍하다. 시끄러운 마음 가라앉으니, 온몸과  마음으로 활기가 돈다.

"으라차차. 차차. 차~!" 몸의 소리가 저절로 방구석에 메아리친다.

번아웃과 무기력이 그제서야 슬그머니 물러선다.


"좀 쉬엄쉬엄해. 너무 안달복달하지 말고.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알겠지?"

"알겠어. 그러마. 이제 몸도 추슬렀고 추위도 그만그만하니 걱정 말고 어여들 가. 자꾸 오지 말고."

한번 왔다 하면 서너 달, 길게는 육 개월 이상을 머물던 아이들이 생경스러워한다.

"아니, 이렇게 빨리? 보름 만에?"


예전에는 그랬지만 이제는 아니다.

마음구석 들여다보고 알아차리는 자.

안 보이는 바닥도 차고 일어서는 자.


나이 들어도 일할 수 있기에

달빛에도 걸을 수 있고 춤출 수 있기에

앉으나 서나 읽을 수 있기에

그리면서 그리워할 수 있기에

매일매일 감사하는 자.


나는야 어쨌거나 쓰는 자.




소년의 문학 열차 다시 출발합니다.

쿠오오오 두구둥 두구둥

오운리 로운리 슬로울리

천천히 잔잔히

쉬엄쉬엄 툭툭


고요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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