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호섭 Feb 12. 2024

설날 : 전지적 승아 시점

내 이름은 승아다. 봄을 봄이라 부르고, 가을을 가을이라 부르듯, 나를 승아라 부름은 마땅하다. 아빠 이름에서 한 글자, 엄마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왔으니 승아를 승아라 부름은 당연하다. 난 엊그제 백일 지나 이제 사 개월 갓 넘긴 아가 아가 갓난 아가다.


새벽부터 엄마, 아빠는 분주하다. 예쁜 핑크 머리띠 해주시더니 베이비 시트에 앉혀 차를 몰아 인천 송도 할머니 댁으로 간단다. 설날 명절이니 세배드려야 한단다. 설날 명절도 세배도 뭔지 모르지만, 엄마 아빠가 즐거우니 나도신난다.


증조할머니를 선두로 온 가족이 송도로 속속 집결한다.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듯 긴급통신망이 가동되고, 사과박스나 한라봉, 온갖 먹거리 이고 지고 전국 팔도에서 씩씩하게 모여든다. 그동안 몇 번 만나 낯익은 가족도 있지만 오늘 처음 본 식구들도 있다. 생김새가 동글동글 비슷비슷한 걸 보니 이런 사람들의 모임을 가족이라 하나 보다. 세배 올리고 세뱃돈이라는 종이도 오고 간다. 웃음과 덕담 속에 단 한 사람 당황해하는 인간이 눈에 띈다. 오래도록 집안에 어린이가 없어 세뱃돈 준비를 못했다는데 핑계 같고, 좀 가난한가 보다. 자신을 오삼촌 할아버지라 소개하며 내 눈을 한참이나 쳐다본다. 나에게 할아버지가 분명한데, 새벽을 거닐고 문장을 노니는 문학소년이란다. 뭔 소린지 모르겠다. 좀 특이하고 재미난 인간이다. 쓰는자라서 가난한 건가? 가난하니 쓰기라도 하는 건가? 이 또한 모를 일이다.


날 만나려고, 초 새벽에 일어나 맑은 정신에 산책하고 맑은 물에 목욕재계하고 왔단다. 마스크를 계속 쓰고 있던

요 할아버지는 나를 안아보고 싶은데 안지는 못하고 안절부절못한다. 어서 날 안아보시라. 몇 번을 눈짓하고 애교 넘치는 옹알이를 해봐도 이 인간, 내 엉덩이만 토닥이고 손가락 발가락만 그저 하염없이 만지작거린다. 허허 뭘 그리 망설이시나. 어서 안아보시라니깐. 갓난 내가 대충 봐도 순둥하고 소박하며 동네 아저씨 풍모 가득한  INFJ가 분명하다.


감기 기운 때문에 혹여나 아가에게 옮길까 봐, 승아를 안지 못하겠다면서도 내 곁을 맴맴 돌며 어찌할 줄 모른다. 그저 내 등언저리를 자꾸 만지길래 뭐해요? 그랬더니 날개를 찾는단다. "하이고, 승아야. 넌 어느 별에서 왔니?" 이런다. 내가 아름다운 동쪽 별에서 온 천사임을 알아차리다니…. 어수룩한 허당스타일 할아버지인데 제법 관찰력도 있고 상상력도 제법이다.

<쓰는 자>라더니 자유로운 영혼임에 틀림없다 틀림없어.


이 할아버지가 궁금하다. 내가 태어난 이 가족, 이 땅 대한민국이 궁금하다. 명절이라고, 전국에서 몇 시간이고 비행기 타고 배 타고 KTX, 고속버스 타고 산 넘고 물 건너 기어코 모여드는 이 땅의 사람들이 궁금하다. 다음에 내가 말이 트이면 눈빛 형형한 문학소년 오삼촌 할아버지에게 꼭 물어봐야지. 가족이란 무엇인가. 까치설날 우리 설날, 사랑이란 무엇인가. 민족대이동이란 무언지 알려달라 해야지. 참, 아이돌이란 또 뭐지? 엄마 아빠한테 날 아이돌 시키라며 우리 집안에서도 뉴진스 같은 연예인 한번 만들어 보자며 껄껄껄 웃는다.

아까 그 오삼촌 할아버지다. 하여튼, 좀 희한한 할아버지다.


덕담과 맛있는 음식을 나눈다. 하하 호호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사랑 넘치는 가족이라니. 그렇구나. 이런 날을 설날이라 하나 보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온 식구들이 주방과 부엌에 와글와글하며 요리하고 나르고 설거지하면서도 동선이 겹치지 않고 일사불란함이 설날 맞춤형 초정예 특공대 같다. 온 식구 대부분이 다양한 알바로 탄탄히 다져진 내공고수, 알바만랩들이라 그렇단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제법 유쾌하고 격의 없는 집안 같다. 그렇긴 해도 며느리인 우리 엄마 좀 힘들어 보인다. 다음 명절부터는 설날 음식 간소화를 추진하자고 제안해야겠다. 왠지 저 할아버지는 내 말을 잘 들어줄 듯하다. 나한테 일분일초도 떠나지 않는 두 눈동자에는 하트뿅뿅이 온종일 가득하다.


"할아버지, 다음엔 날 꼭 안아줘야 해요. 감기 얼른 나으시고요~♡ 2024 음력설날에 승아올림."



#인천 #송도 #큰누이네집 #손녀 #승아 #아가 #천사 #설날 #가족 #사랑 #걷기 #쓰기 #그리기 #내가 #외삼춘할아버지라니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