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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섭 Jul 07. 2024

응원단장 아빠의 하루

토요일. 아빠 출동의 날이다. 전시회장은 안에도 밖에도 엄청난 참관객들이 가득했고,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어질어질해지는 아빠는 행사장 입구에서 서성인다.

딸이 마중을 나온다 하는데 구름인파에 가려 부녀의 만남은 난항을 겪는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아빠다.

이 땅의 모든 엄마 아빠가 그러하듯, 아이들 초중고 졸업사진의 그 빼곡한 얼굴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쏙쏙 "요깄다."며 기가 막히게 자신의 아들딸들을 찾아내지 않는가. 유전자 끌어당김의 법칙이려나. 역시나, 수많은 얼굴 사이 저너머에 가녀린 목을 길게 빼고 아빠를 찾고 있는 딸이 보인다. 일러스트레이트계의 신성! 어니니 작가다.




딸의 손 꼭 잡고 도착한 어니니 부스 Q16. 세상 모든 핑크를 끌어다 모아놓은 오밀조밀 예쁜 공간. 딸의 우주다. 든든한 사위가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고 부스 앞에는 한국인, 외국인, 외계인 가릴 일 없이 와글와글이다. 편한 복장으로 입장한 아빠는 본격적으로 아빠의 R&R (Role & Responsibility) 수행을 위해, 소매를 걷어 붙이려다가 멋쩍게 웃는다. 걷어 붙일 소매 없는 반팔이니 말이다. (지난번 전시회 때 의복을 차려입고 갔더니, 젊은 방문객들이 웬 아저씨? 하며 불편해하던 눈치였기에...)

사실, 아빠의 역할과 책무란 게 별게 없다. 부스 주변을 맴맴 돌며 사진 찍고 작품이 비뚤게 전시되면 바로 놓아주고, 방문객들이 오며 가며 불편하지 않게 안내하거나 딸과 사위 힘들어할 때마다 썰렁한 농담이라도 한 두 마디 건넨다. 어슬렁거리며 이웃부스에 가서 어니니 작가와의 협업을 중개하거나 일정 끝나면 든든히 밥 먹이고
등 토닥이는 게 전부다. 앞에 직접 나설 때와 뒷공간의 배경화면처럼 자리해야 할 때를 아는 자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이형기 시인의 '낙화' 시의 맥락을 살짝 가져와 봄~^^)




아이들을 키우면서, 살아오면서 그랬던 듯싶다. 무슨 투철한 자녀교육 철학이나 이론은 당연히 없었고, 그저 내 앞에 마주한 일상의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는 삶의 태도와 존재에 대한 예의를 부모가 성실히 보여주면 되겠다 생각한 게 전부다. 자녀들은 부모를 보고 배우며 삶의 주인공으로서 본인의 생을 오롯이 헤쳐나간다. 그러니, 부모는 그저 자녀의 응원단장이거나 잠시 함께 타고 가는 옆자리 조수석의 동승자 일 뿐. 그런 생각을 오래도록 했고 지금도 그렇다.
이런 걸 소신이라고 하나? 잘 모르겠다.
물론, 의식적으로 의도하진 않았으니, 생활 속 여러 난관과 결여와 불안이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동력이 되어 , 오히려 단단한 성장의 결기를 심어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귀갓길에 Coex 영풍문고에 들렀다. 그 수천수만 권의 책의 바다에서 척척 수영하던 사위가 외친다."아버님, 여기요." 아이고...
사위가 쏙쏙 찾아낸 건 나의 첫 책이다. 책장옆에 사위와 딸은 해맑게 웃고 있고, <멈춤을 멈추려합니다> 앞에선 아빠는 슬쩍 눈가의 물기를 훔친다. 또또또 주책바가지가 나오려 하니 참아야 한다. 도대체 갱년기의 끝은 언제인가...

책장에서 책을 꺼내 메인 매대 유명책들 옆에 슬쩍 놓고 기념촬영을 했다. 수십 년간 품어 온 로망,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대형서점에서 내 책을 만났고, 사위라는 형식적인 이름보다는 정겹고 든든한 아들을 또 하나 얻게 되었으며, 씩씩하게 전진하는 딸의 모습을 보았다.

일요일엔 아들과 큰 딸(며늘아가)이 출동해서 지원해준다하니, 말 그대로 월드클래스 드림팀

<팀 어니니>의 시간이다.

늦은 저녁 동인천행 급행열차에 올라탄 아빠의 가슴 가득히 감사가 넘쳐흐른다. 분명, 고마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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