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따오 블루스 (2)

글로벌 술꾼들과의 술맛 나는 이야기 - 첫 번째 : 중국 청도

by 김호섭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비서가 오늘 일정계획 보고를 한다.

"사장님, 오늘 한국에서 손님이 오신답니다. 오전 10시입니다."

"누구?"

"OO글로벌 김헤롱사장입니다."

석 달 전부터 메일과 메신저로 한국 제품 설명과 관련 소통을 했던 한국의 무역상이다.

누구 소개로 알게 된 건 아닌데 무척이나 적극적이다. 실무진들이 밤이고 낮이고 질문을 퍼부어도 언제나

24 ×7 ×365 실시간으로 답변을 주길래 이 사람은 도대체 잠을 안자나? 궁금하기도 해서 만나자고 한 거다.

그나저나 날 어떻게 알았지?


9시 50분이다. 그가 왔다.

흠, 제법 인물은 훤한데? 시장 양아치나 무역 사기꾼 관상은 아닌 듯싶고, 카톡 닉네임이 80년대 이승기

라니 낄낄. 좀 웃긴 구석도 있고 ~

차를 마시며 서너 시간이 흘렀다. 나는 뭔가 특이한 점을 발견한다.

이 친구, 이거 어지간히 말이 없군. 대부분 한국 무역상들, 영업인들 오면 입에 거품 물고 말하기들 바쁜데,

이거 뭐지? 제품이야 대략 파악은 된 거지만 그래도 이건 좀 과묵이 심한 거 아니야? 내가 이래 봬도 칭따오

바닥에서 Top 3에 들어가는 거상인데 자기 할 말 다했으니 이제 나더러 결정하라는 건가?

보통 배짱이 아닌데?

자세나 분위기도 심상치 않고... 분명히 특이한 구석이 있는데..

흠, 그렇다면 나의 필살기인 다면평가 시스템을 가동해 좀 더 알아봐야겠군.


"어이 장 사장, 여기 좀 이상한 한궈러가 와 있는데... 응. 그렇지. 하울러 하올러. 한 열명 정도면 되겠지 뭐.

그래 저녁에 거기서 보세." " 여보, 난데. 저녁에 거기 알지? 란란이랑 같이와. 그대도 한번 봐보고 어떤지 평가해 주시게. 하울러 하올러."

저녁 술자리에서, 김헤롱은 1회전, 2회전, 3회전을 치르고도 초지일관 흐트러짐이 없다. 보통 내공이 아니다.

오랜만에 제대로 물건 하나 만났구만.

한국은 역시 만만히 볼 나라가 아니야. 우리 중국에도 바로 저런 인간들이 필요한데 말이야.

어라? 갑자기 일어나 노래를 부르더니 나더러 블루스를 추라고? 러브샷을 하라고?

이 무슨 시츄에이선이지? 술 한잔만 먹어도 불타는 고구마가 되는 나에게 이제 춤에 러브샷이라니?

살다살다 이런 도발적 인간은 처음인데?

좀 창피하긴 하지만 일단 응해보자.

어라? 마누라가 왜 이렇게 좋아하지? 란란이 도 무척이나 즐거워하고.

평가고 뭐고, 나도 오랜만에 긴장 좀 풀고 마셔볼까? 내 주량을 잊고 그만 폭음을 하게 된 사유다.

어어? 저기 나한테 오는 게 호랑이야 사람이야? 어떡하지? 에라 모르겠다. 엎어지자.



이상은, 전지적 왕서방 시점에서 당시 그의 심리와 정신상태를 AI 쪽집게 예상시스템을 가동하여 정리해본

추론이다. (김헤롱을 다소 과하게 좋은 평가를 한 것은 올드 버전 AI의 치명적인 오류임을 밝힌다.)


엎어진 왕서방은 직원들의 어깨에 실려 식당을 나서는데, 왕서방의 와이프가 김헤롱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김헤롱선생님, 오늘 너무 반가웠구요. 무척이나 즐거운 만남이었습니다. 블루스 제안은 정말이지 압권이었습니다. 고맙구요. 사업적인 얘기는 수일 내로 우리 사장님이 연락이 갈 겁니다. 안녕히 가세요."

왕서방이 너무 취해버려, 결론을 못 내고 자리를 파하게 된 헤롱은 허탈감을 달래며 묵묵히 숙소로 향한다.

바로 침대에 쓰러진다. 헤롱도 인간의 신체구조를 가진 호모 사피엔스다 (로봇아님). 그 독한 술에 그 라고 어찌 멀쩡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이슬로 다지고 다진 (마늘이냐? 다지게?... 이거 어디서 많이 써먹던 멘트인데?) 내구성과 치열한 정신력 그 덕분이겠지.

자. 이제 결과는 신의 뜻이다. 모든 것 그만 내려놓고, 장렬히 쓰러져야 마땅하다.

전사자의 모습으로 헤롱은 고통의 시간을 맞이한다. 쓰라린 목은 이미 활화산이다.

칭따오의 밤은 속절없이 깊어만 간다.


수일내로가 아니라, 바로 다음날 연락이 왔다. 왕서방이다.

이런저런 조정 필요 없이, 헤롱이 제시안 조건으로 바로 주문을 내린다.

모든 영업인의 희망인 Closing. Deal ! 발주 오더 (PO)를 받는 순간이다.

40피트 하이큐 컨테이너 두대 분, 가격은 약 3억 원 정도다. 초도 물량치고는 꽤 많은 물량이다.

의심 많은 중국인들이 결코 행하지 않는 희한한 일을 지금 왕서방이 하고 있는 것이다.

술이 아직 덜 깬 건가?

대신 자기네 사람을 보낼 테니 진행 전 과정을 함께하고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조건이다.

그 조건은 오히려 내가 땡큐다.

전화 통화를 하는 와중에 헤롱은 벌써 달리고 있다. 칭따오 공항으로. 한국행 티켓을 끊어라.

왕서방 맘 변하기 전에 지금 필요한 건 뭐? 스피드!!!

이렇게 왕서방과의 거래는 시작되었다.




그 거래는 희한하게 시작되었지만, 이후 스토리는 그저 장밋빛으로 흐르진 않았다. 후속 거래가 계속 이어지던 차에 양국 간에 사드라는 복병을 만나 모든 거래가 어이없이 끊어졌다. 손 쓸 시간도 없이 하루아침에.

급변하며 치열하기도 한 국제정세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무서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혜롱은 이미 중국에 넘어가 있는 재고 처리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발버둥을 다했지만 엄청난 손해 또한 막을 수 없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왕서방 본인도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뒤돌아서는 그의 눈빛은 쓸쓸했다.

꽉 잡고 있던 손을 풀면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알고 나도 안다. 개인이 어쩔 수 없는 한계라는 것을.


그때의 손해는 헤롱의 사업에 치명적이었고 오랜 기간 그 후유증과 여파에 시달리고 지금도

그 연장선에 있다만 이제는 그 어떤 회환도 후회도 없다. 최선을 다한 자는 울지 않는 법.

인생의 여러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 마음의 고즈넉한 지평선만 있을 뿐.




그 후로 7 ~ 8년이 흘렀다. 2022년 7월 16일이다.

다시 왕서방으로 가보자.


왕서방 : 란란아, 너 예전에 한국 김헤롱 사장 기억나니?

란란 : (그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란란은 이제 어엿한 숙녀가 되어 있다.) 그럼요. 그 훈훈한 아저씨.

왕서방 : 소문을 들어보니, 그때 사드 때 이후로 사업에 엄청난 타격을 입고 아직도 어려움에 처해

있다더구나. 수습할 시간이라도 줄걸.. 내가 좀 심했나?

란란 : 아빠 정말 너무 하세요. 그분에게 우리가 많은 도움을 받고,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어쩜

그리 냉정하세요? 엄마와의 칭따오 블루스 그 낭만은 또 어떻구요. 아빠의 낭만은, 그 낭만의 기억은

설마 유효기간이 있는 건가요? 다 잊으신 건가요? 정말 실망이에요. 아빠.

왕서방 : 흠. 그렇긴 하지. 하도 국가에서 강력한 지령이 내려와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만...

란란 : 아빠. 그때의 거래는 그냥 거래가 아니라고 봐요. 우연히 찾아온 인연이랄까?

인연의 소중함을 늘 가르쳐오신 아빠가 어찌 말 따로 행동 따로 인가요? 정말 실망이에요. 아빠.

왕서방 : 그래, 니 엄마도 툭하면 한국 김 사장 얘기를 하더라구.

아무래도 코로나 끝나면 내가 한국 가서 만나볼까?

란란 : 역시 우리 아빠 멋져요. 아빠 짱! 짜요짜요!




김헤롱의 AI 쪽집게 예상시스템도 이 폭염의 더위에 서서히 맛이 가는 듯 하다. 상상의 도가 지나치더니

스스로 돌리는 희망 회로는 더없이 어이가 없다. 이 AI 시스템은 다른 말로 뇌피셜이라고도 한다.

뉴 버전으로 교체를 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김헤롱과 너무 정이 들어서 그럴 수 없다.

그래도 만에 하나, 왕서방이 한국에 온다면,

나는 그에게 이슬을 대접할 것이다. 열 명의 친위대도 없다. 죽자 사자 마셔대는 그 악다구니도 없다.

그저 그와 함께 그간의 삶과 지혜와 경험을 편안히 나누면 될 일이다.

꼭 말해야 할 것은,

그 시절 낭만을 함께한 추억과 인연은 유효기간이 없다는 사실. 그것 뿐이다.


그래. 인생과 인연은 어쩌면 이러할 것이다.

오르다 지치면 쉬어가고

내려오다 가파르면 돌아가고

아프면 기어가고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고

그렇게 살다 보면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런 걸 '시절 인연'이라 하던가?)

만날 수 없다면 그 것 그대로 또한 인연의 몫이겠지.


그래도 혹시나 만나게 된다면,

다시 이어질 그 인연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흐를 것이다.

국가의 경계나 언어나 또는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 그런 것 보다

더, 훨씬, 높은 곳에서 흐른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강물처럼.

바다로.


아... 약 먹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