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케 대마왕 사토상의 도발

by 김호섭

헤롱은 대학 졸업 후, 10년 정도 몸담은 국내 대기업을 박차고 나온 뒤, 다양한 외국계 회사에 다닌 적이 있다. 미국계, 프랑스계, 중국계, 싱가폴계, 오골계(?) 등등 멀티 내쇼날 컴퍼니에서 짱짱히 능력 발휘(?) 하기보다는 그 세월만큼 좌충우돌 다양하고 희한한 경험을 많이도 쌓아 올렸다.


미국계 컴퓨터 회사 D사에 다니던 시절 이야기다.

당시만 해도, 아시아 지역 본사는 싱가폴이었고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이 구조속에 편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별리 유난스러운 일본은 여기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조직체계 노선을 고집했고, 시장규모나 매출 규모로 봐서 일본 시장 자체가 크다 보니, 미국 본사도 어쩔 수 없이 특이한 일본 별동대 구조를 승인하게 되었다.

문제는 대한민국이다.

싱가폴 AP본사 소속이 아니라, 일본 소속으로서 편제되는 바람에 일본지사의 통제를 받게 되는 속국이 되어 있던 시절이다. (자주독립, 해방의 그날이 수십 년이 흘렀어도 경제 속국의 어두운 그림자는 산업계 전반에 꽤나 오래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서 헤롱의 부서장은 두 명이다. 한국본부장, 일본 본부장.

아니 세명이다. 미국 본부장.

아이고, 시어머니가 세명이라니. 앞날이 캄캄하다.


어느 날.

일본에 미국 본부장이 업무 시찰을 온단다. 일본 본부장 기무라상은 한국의 헤롱을 호출한다.

기무라 : 헤롱. 너도 일본으로 와서 미국 본부장에게 한국 측 업무 보고해라.....

헤롱 : 알겠다. 오바. (바빠 죽겠는데 누굴 오라 가라 하냐... 니들이 와라 서울로.라는 말은 못 했다. 조직과 계급이... 국가가 깡패니까.)

헤롱은 긴급히 도쿄로 날아간다.

미국 본부장은 40대 초반의 여성분이다. (이름은 에이미). 일본 본부장 기무라상도 40대 초반. 그 당시 헤롱이 40대 후반. 둘 다 한참 동생 벌이다. 그러나 헤롱은 나이에 연연하지 않는다. 능력과 성과로 승부하는 프로의 세계에서 꼰대스런 무게는 잡지 않는다.

진땀 가득 2박 3일의 업무보고가 끝나고 신나는 회식의 시간이다.

에이미는 1차 식사자리만 가볍게 하고 호텔로 돌아갔고, 일본 팀 멤버 20여 명, 기무라상과 함께 2차 술자리가 이어졌다. 대부분 조용한 스타일의 팀 멤버들은 맥주 한두 잔씩 홀짝거리더니 슬슬 사라진다. 개인주의 강한 일본의 술 문화이겠다. 시간이 좀 더 흐르니, 대여섯 명이 남았고 술자리 주제는 회사 얘기, 일 얘기뿐이다. 하이고...재미없어진 헤롱은 그들이 마셔보라고 따라놓은 일본 소주를 마셔본다. 하이고... 물이다.

그 저 예의상, 오이시 오이시만 외친다. 가장 길게 아는 일본어 '이라세이마셍'도 가끔 곁들인다. 깔깔 좋아라 한다.

이때.

사토상이 다른 술병을 하나 꿰차고 옆자리로 다가와 앉는다.

사케다. 맥주컵에 콸콸콸 따른다.

오호라, 이 구역의 술꾼은 너로구나. 그래, 어서 오너라.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사케는 시원한 청주 같은 맛으로 나에게 왔다. 흠. 나쁘지 않은데? 두어 순배가 돌자 자리에는 기무라상과 사토상 그리고 헤롱만 남았다. 다 도망갔다.


취기가 오른 사토상은 자기 조상이 사무라이 출신이고 자기 집에 가면 온갖 국보급 유물들이 즐비하고 정치권에 친지들이 와글 하며 등등 자랑질을 시작한다. 가방에서 서슬 퍼런 사시미라도 꺼낼 듯 눈빛도 가늘고 날카롭다. 툭툭 한국인, 특히 한국 여성들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말도 섞인다. 사토상의 도발이다.

오호라. 이 구역의 진상은 너로구나.

오냐. 그러시겠다! 사토상의 도발에 헤롱의 가슴은 일렁이며 치밀어 오른다. 분노다.

허나 헤롱은 이를 표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사토의 잔에 사케를 꽉꽉 채운다. 팔꿈치로 발꿈치로 오지고 다지고 채운다.

"한잔 마시고 한잔 줘." 이미 취한 사토가 움찔한다. 그래도 사나이라고 벌컥 마시고 잔을 채워 헤롱에게 건넨다. 잔을 건넨 사토의 손이 채 제자리에 스르르 도착하기도전에 헤롱의 잔은 비워졌고 다시 가득 채워져 리턴된다. 사토의 손이 떨린다.

그리고, 헤롱은 단호한 멘트를 날린다.

"나에게는 사무라이 칼보다 더 무섭고 강한 게 있지. 바로 나의 조상들이란다. 그 칼을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들. 나라의 패망은 겪었어도 개인의 패배는 없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로 꽉 찬 대한민국. 거기서 살아온 모두가 나의 조상들이지. 우리는 누군가를 해하지 않을 뿐,

약한 사람들이 아니란다. 사토야."

사토의 눈빛이 심하게 요동친다. 벌떡 일어선다.

'왜. 한판 하자고? 몸의 대화를 나누자고? 참 교육을 실시할 시간인가? 아서라. 마서라.다친다. 나 유단자란다. 이슬 9단+ 태권도 1단+ 유도 1단= 합이 11단 이란다.'

헤롱의 눈빛에 범이 내려오려는 찰나, 쎄한분위기를 감지한 기무라상이 비틀거리는 사토를 부축하고 나가면서 헤롱에게 사과한다.

"스미마셍. 헤롱. 사토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게."

그래도 하버드 물먹은 기무라상은 부끄러움을 좀 아는가 보다.




호텔로 돌아온 헤롱은

전날 마트에서 사다 논 이슬과 함께하며 하루를 정리한다.

헤롱 : "술 취한 녀석에게 좀 격하게 대응한 건가?"

이슬 : "할 말을 단호하게 한 것은 참 잘한 것이고 몸싸움 직전까지 마음을 끌어올린 건 과한 것이야.

이 점은 옥의 티였어. 그래도 아까 말할 때 너 좀 멋지던걸~ 살짝 반했지 뭐야~"


이슬의 조언은 차분함을 안긴다.

밤이 깊었다.


도쿄의 달은 서울의 달보다 날카롭다.

1Q84 하루끼의 달이 저 달이냐? 쳇. 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