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일 이슬 동맹?

글쎄요.

by 김호섭

다음날이 밝았다.

헤롱은 살짝 두통을 느낀다. 간 밤의 사케 탓이리라.

'나라도, 술도, 달도, 인간도... 나랑은 잘 맞질 않는구나. 에휴. 뭐 어쩌겠냐. 내 편한 곳에서 살면 그만이지 뭐.

어서 짐 싸고 집으로 가자.' 헤롱은 아침식사를 위해 식당이 있는 로비로 서둘러 내려간다.

에이미는 미리 와 있다. 하여튼 부지런하다. 건강관리를 위해 마라톤을 일 년에 서너 번 뛴다는 철의 마녀다.

빨리 오라고 손짓이 바쁘다. 급히 할 얘기가 있단다.

한국으로의 귀국 일정을 하루 미루란다. 중요한 고객사 미팅이 있는데, 헤롱도 함께 가면 좋을듯하단다.

심드렁한 헤롱은 '뭐... 그러시던가'라고 생각하면서도,

업무적 멘트에 익숙한 헤롱은 "제가 쓸모가 있는 미팅이라면 어디든, 누구든 만나야지요."라고 담백하게 말한다. 프로다. 100점짜리 답변이다. 에이미가 미소 짓는다. 빨리 집에 가고픈 마음만 아프다. 미리 얘길 해주던가. 참나. 이거야 원.




N사의 일본법인 사무실이다.

N사는 당시 한국에서 깨톡이라는 메신저 서비스를 런칭한 후, 국민 메신저로 이름을 널리 알리던 회사다.

일본에서도 메신저 서비스 런칭을 위한 프로젝트가 막 시작되던 시점이다. 일명 LINE project다.

서버, 스토리지, 솔루션 등을 제공하는 D사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고객으로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큰 프로젝트의 이니셜 스테이지에 헤롱도 앉아 있다.

테이블 맞은편에는 N사 한국 본사의 프로젝트 최고 책임자 (한 씨로 기억된다. H라고 하자.), 임원진들, 통역이 앉아 있고 D사측에서는 에이미, 기무라 상, 헤롱, 그리고 아직 눈이 덜 풀린 사토상이 앉아 있다.

소통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진행된다.

H (한국인) <-> 통역 (일본인) <-> 기무라 상 (일본인) <-> 에이미 (미국인)

한국어를 일본어로, 다시 일본어를 영어로... 비합리와 비효율의 커뮤니케이션이 진행되다 보니 미팅은 매끄럽지 못하다. 답답해하던 H는, 헤롱을 보며

H : "혹시 중국분이신가요? 한국분이신가요?"

헤롱 : "아... 아니, 저는 순수 토종 한국산 인간입니다만..." (어딜 봐서 내가 중국인처럼 보인단 말인가?

참 나. 그래도 일본인 같진 않다는 생각에서 물어봤으리라.. 위안 삼는다.)

H : "그러면 당신이 제 말을 에이미에게 전하면 좀 대화가 수월하지 않을까요?"

헤롱 :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가운데 앉아있던 기무라상과 사토상이 변두리 자리로 빠지고 헤롱이 센터를 차지하는 순간이다. 걸그룹이던 보이그룹이던 비즈니스맨이던 센터 포지션의 무게와 역할은 만만치 않다. 자리 재배치의 그 짧은 순간에 헤롱은 두려움과 배짱이 교차한다. 이봐. 자네. 짧디 짧은 영어실력으로 감당할 수 있겠어? 요런 두려움을 밀쳐낸 건 에라 모르겠다 부닥쳐보자 정신이다. 평생에 영어실력이 제일 좋았던 제물포고등학교 전교 3등 승기*를 급히 호출한다. (* 승기는 헤롱의 셀프 별명이다. - 80년대 이승기-다. 승기야. 너만 믿는다. 잘해보자.)

일본어가 빠지자, 대화는 순조로워지고 매끄럽게 이어지며 원만한 결론으로 치닫는다. 어라? 농담과 덕담마저 오고 간다. 그저 하던 말만 주야장천 우려먹고 써먹고 밥 말아먹고 또 써먹는 사골 영어의 대가 헤롱이

중요한 미팅 자리에서 통역을 하다니..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우리 삶에 허다하게 일어난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헤롱의 잠재력이란. 후훗.


미팅을 마치고, D사의 팀 멤버들은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배웅을 나온 N사 팀 멤버들은 90도 폴더인사를

시전 한다. 기무라와 사토도 그런다. 모두 일본인이다. (야쿠자냐?)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그러고 있다. 갑을관계를 떠나 관습적으로 그런다. 오바가 넘쳐 육바다. 간단한 목례를 마치고 당당히 허리를 쭉 펴고 서있는 사람은 양 팀 통을어 세 사람이다. H, 에이미, 그리고 헤롱.

H : "언제 귀국하시나요?"

헤롱 : "아마 내일쯤 들어갈 듯합니다."

H : "저도 며칠 내로 들어갈 건데, 한국에서 소주 한잔 합시다!"

헤롱 : "잘 알겠습니다. 이슬과 함께 뵙겠습니다."

H와 헤롱 사이에 훈훈한 미소와 눈빛이 오고 간다. 짧은 시간의 만남에서도 이렇게 잔잔히 흐르는 것은 타국에서 함께하는 한국인만의 정이다. 일본인들은 아직도 허리를 못 펴고 있다. H가 엘리베이터 문열림 버튼을 계속 누르고 있어서...(그래 너희들은 계속 그러고 있어라.) 에이미만이 그 훈훈한 미소와 눈빛, 정의 교류를 직관하고 따라 미소 짓는다. 훈훈하게.




미팅이 원활히 끝났다는 판단이 섰는지 에이미가 저녁을 쏜단다.

이번 장소는 한국식당이고 술은 이슬이 나온다.

에이미 : "헤롱, 너와 같이 오늘 미팅에 간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고마웠다."

헤롱 : (뭘 그 정도 가지고...) "저의 쓸모가 있었다니 다행일 뿐입니다." 추가 100점. 합이 200점이다.

기무라 : "헤롱, 덕분에 일이 잘 진행될듯합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헤롱 : "제가 쓸모가 있었다니. 아리가도 고자이마쓰"

사토 : (눈도 못 마주치고 쭈뼛거리다가) "헤롱, 어젠 미안했습니다. 스미마셍"

헤롱 : (그냥 웃어준다.)

태평양 바다 같은 넓고 깊은 마음품을 자랑하던 헤롱이지만 사토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람의 이면, 특히, 일부 일본인의 이중적 가면. 타인의 상처에 조롱이라는 소금과 비열이라는 칼을 들이대는 음습한 습성을 알기에. 한마디의 말도 아낀다.


에이미 : "이슬. 나이스. 베리베리 굿~~~"

갑자기 에이미가 헤롱의 어깨에 팔을 걸고 헤롱이 가르쳐준 ''을 외친다.

헤롱 : (어허.. 여기서 이러시면.. 고맙지 말입니다.) 헤롱은 좌중 모두의 어깨를 걸고 한바탕 신나는 축제를 이끈다. 이슬이 돌고 돌고 돈다. 술은 역시 기분 좋을 때 마셔야 제맛이다. 취함은 흥겨움이며 나누는 건 추억이다. 한, 미, 일 삼국 간의 이슬 동맹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열외 1명은 사토다.

나라와 나라 간의 벽과 개인과 개인 간의 벽이 부딪히는 이 순간은 나라 탓인가? 개인의 몫인가?


호텔로 돌아온 헤롱은 다시 하루를 결산한다.

다 좋은 하루였다만, 사토와의 시간은 앙금처럼 남는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말이 떠오른다.

나치 독일의 죄악을 현대 독일이 진정한 사죄로 용서를 구하였고, 유대인들이 받아주면서 한말이다.

용서전에 진정한 사죄가 우선이다. 진정한 사죄라... 그리할런지.


친구는 만나면 좋은법인데,

글쎄요.

만나면 껄끄러운 친구... 일본이다.


2022.8.18.

띵동. 깨톡이 왔다.. 대한통운이란다.

YES24라는 분이 보낸 택배가 문 앞에 배송 완료란다.

책 제목은 '하얼빈'. 안중근 의사에 대한 김훈 선생의 최신작이다.


역사는 푸르게 살아서 펄떡이며 바라본다.

과거뿐 아니라 오늘과 내일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