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치집에서 고등어(만) 먹기
마음의 메뉴판에서 골라보아요.
회사 구내식당 외부벽에는 환풍기가 설치되어있다. 그 아래를 지나가는데,
새하얀 연기와 함께 고소한 생선구이 냄새가 모락모락 난다. (오감 + 직감 = ) 육감 은 즉시 반응한다.
이건 필시 등 푸른 고등어다! 고등어는 그냥 고등어가 아니라 반드시 등 푸른 고등어 이어야 한다.
등 푸른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서야 고등어라는 명사는 명징하게 완성되니까.
오호라. 이모님들이 준비하시는 메뉴로서 오늘 점심때는 고등어구이를 먹게 되겠구나. 유후 ~
산울림 김창완의 노래가 절로 나오니 이럴 때는 바로 흥얼거려야 한다.
"어머님은 아니, 이모님들은 고등어를 구워주려 하셨나 보다...(중략)... 이모님들은 봐도 봐도 좋은 걸."
이 냄새는 이 향기는 중소 영세 기업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공장지대의 삭막한 회색의 아침을
펄떡펄떡 살아 숨 쉬게 하는 바다의 아침으로 변환시키기에 충분한 마법의 향기이리라.
내가 나를 생각해봐도 좀 특이하고 유별난 구석이 있다.
남들과 뾰족하게 대립각을 세우는 일이라고는 99.999% 없는 스타일이고 괜한 분란을 일으켜서 주변 공기를 싸하게 만드는 일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 세상 둥글둥글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그래 왔었다. (얼굴마저도 동글동글하다.)
언뜻 (스스로 하는 자뻑스런) 셀프칭찬으로 보일지 모르나 이런 성격을 개성 없는 또는 색깔 없는 전형적인 인간의 유형이라고 스스로 무척이나 오래도록 싫어했었다. '내가 참고 말지'하는 나와는 달리, 다소 언쟁이 있더라도 똑 부러지게 자기 소신을 피력하고 주장하는 타인을 보면 그게 그렇게 멋지고 부러울 수가 없었다. 자기 인생에 주인공으로서 한껏 자존감 높은 종족으로 인식했고 그저 선망의 대상이었다.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 본인의 성향을 바꾸려는 수많은 노력은 늘 무위에 그쳤고, 그저 운명이거니 생긴 대로 받아들이며 살았는데...
나이 먹어서 인지, 온갖 세상 풍파에 시달려서 그런 건지 이유는 확실치 않다만 나의 뜨뜻미지근한 성향에 확실한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최근 들어서 더욱 그렇다.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니 작년 9월 브런치에 글쓰기를 시작할 무렵부터라고 추정해본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 쨍하게 달라진 건 글쓰기를 시작한 일뿐이니까.
여러 스승님들의 글을 보니, 글쓰기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는데 그럼 이 과정 속에서 나올 수 있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현상인가? 아직은 좀 안갯속이다.
우리네 일상다반사에서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열불 낼 일도 아닌데, 별일도 아닌데 다소 까칠하게 구는 요즘의 모습은 나도 내가 낯설다. 이러한 변화는 '당연한 심리적 욕구인가? 단순 노망스런 짜증인가?'
'이것은 치킨인가 갈비인가' 이후로 최고의 질문으로 손꼽힐만하다.
동네 어귀에 삼치골목이 있다.
삼치구이 전문 식당들이 약 1백미터 정도 길이의 골목길에 빼곡히 들어서서 영업을 해왔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대의 삼치구이는 인천 항만의 노동자와 수출 5공단 6공단의 근로자, 늘 주머니 얇은 학생들에게 최고의 안주이자 저녁식사로 인천시민에게 수십 년 동안 사랑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오늘날에는 주요 상권이 모두 송도나 청라, 구월동으로 옮겨간 지 오래고, 온갖 다채로운 음식 아이템의 집중포화에 밀려 구름 같은 인파로 북적이던 동인천 삼치 골목길은 썰렁하고 을씨년 스러운 모습과 전통 골목 인증 스티커로만 간신히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무보증 월세 25만 원 단칸 월세방에서 이 삼치골목은 직선거리로 2백미터 정도다. 매일 올라가는 공원도 직선거리로 2백미터고, 책 보러가는 동네도서관도 2백미터, 담배 사러가는 편의점은 7십미터, 장 보러 가는 장터 마트도 3백미터 안짝이다. 이 동글동글한 인간의 활동반경은 회사 출퇴근 동선을 제외하고 동그라하니 5백미터를 넘지 않는다. 그 바운더리 안에서 이 인간은 주로 서식하고 출몰한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단출하고 심플한 라이프를 영위하기 위해서란다.
어디 멀리 근사한 여행을 다닐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은 굳이 밝히지 않는다.
애써 합리화하는 마음은 애잔이다.
움직이는 동선이나 시간이나 거의 동일한 루틴이다 보니 동네 사람들이 시계를 안 보고 헤롱을 본다.
칸트다. 인천 칸트다.
이슬 한잔 생각나는 저녁 어스름이나 주말에는 당연히 삼치골목으로 향한다. 이웃동네 신포동에 더 많은 식당과 술집이 있지만 날도 더우니 홍예문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 수고를 택하진 않는다.
굳이 이슬 한잔뿐 아니라도 동네에 새로운 변화가 뭐 없나, 요즘 술꾼들은 무슨 주제로 얘기들을 하고 서로 싸우고 사랑하고 그러고 사나 궁금한 마음과 코로나 방역 완화로 부쩍 늘어난 사람 구경을 위해서다. 특히 사람구경은, 오래도록 세상을 등지고 살아온 헤롱에게는 아무런 관계없는 타인을 바라보면서 그나마 세상을 향한 창문을 살짝이나마 열어놓으려는 최소한의 의지이자 노력이다. 이런 면면을 보면 역시 이 인간에게 작가스러운 구석도 조금 있어 보인다.
삼치집에 들어서면 알바님이든 사장님이든 일단 물어본다. "몇 분이세요?" 혼술 마니아인 나로서는 이 질문이 제일 부담스러운 순간이다. 그리하여 간단히 오른손 검지 손가락만을 (치켜올리며) 시크하게 활용한다.
그것은 나 홀로 온 손님이라는 의미의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이다.
대부분 화장실 근처, 부엌 근처의 구석자리로 안내된다. 이 정도만 돼도 얼씨구나다.
어느 한두 군데 식당에서는 늘 "죄송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입장을 거부당한다. 2인 이상이어야 된다는 얘기다. 그 사장님도 먹고사니즘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 그 부분은 기본적으로 인정한다.
예전에는 순순히 받아들이고 이 것은 운명이거니 했다. 그러다가 마음속에 뭔지 모를 반발심이 올라온다.
사장님께 딜을 한다. "2인분 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사장님: "그럼 그러시던가..." 골목에서 제일 잘 되는가게라니 사장님도 만만치 않다.
겨우 자리를 배정받는다. 2인분용이 아니더라도 삼치 한 마리는 제법 크다. 이렇게 큰 녀석이 이렇게 저렴해도 되는지 다소 의아하지만 가격보다는 그 양에서 문제는 발생한다. 나이 들면서 먹는 양이 많이 줄어든 탓에 삼치 한 마리를 꾸역꾸역 다 먹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고역이다.
한갓지게 구이 안주에 이슬 한잔 하려는 고즈넉한 본의는 어디로 가고 2인분용 삼치를 반드시 다 먹어버림으로써 손님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보여주겠다는 이상한 신경전을 꽤나 오래 펼쳐왔다.
그냥 먹을만큼 먹고 남기고 나오면 될텐데...미련이 곰탱이소릴 들을 만하다.
1인용의 삶이 2인용의 삶보다 못난 삶, 부족한 삶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해 보이겠다는
아무도 관심 없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이상한 소명의식의 발로이리라.
내가 나를 생각해봐도 참 별난 구석이란 바로 이 부분이다.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에서 30%가 넘어가는 통계청 자료를 들이밀지 않아도 이미 주변은 1인 가구가 대세인 세상이다. 이런 마당에 이렇게 1인은 무시되고 괄시받아서는 안된다는 내 마음과 효율을 따지는 자본주의와 충돌이 빚은 해프닝이다. (아주 극히 일부 식당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다른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한마디로 억지 춘향이다. 어여쁜 춘향에 '억지'가 붙어서 억지로 일을 하거나 어떤 일이 억지로 겨우 이루어지는 경우를 의미한단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삼치집에서의 나의 경우가 딱 억지 춘향이다.
어쨌거나 자연스럽지 못한 이 풍경을 슬기롭게 해결할 방안을 고심하다가 벽에 붙은 메뉴판이 눈에 들어온다. 고등어구이, 박대구이, 계란말이, 오징어... 무려 수십 가지 음식의 이름이 적혀있다.
눈이 번쩍인다.
그렇지. 삼치골목 삼치집에서 삼치만 먹어야 된다는 이 편견은 도대체 누가 심어놓은 것인가? 그러한 기본 개념이나 가치가 개인의 개별 선호를 일반 사회성의 힘으로 무시하거나 때로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무시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리라. 아무도 이런 기본개념을 심어놓은 적 없지만 헤롱이 저 스스로 그리 판단한 거라면. 더 이상 뭐 할 말은 없다. 헤롱은 생각을 좀 더 펼쳐본다.
메뉴판에 적힌 수많은 음식처럼 개인의 욕구와 감정, 마음도 충분히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일 아닐까?
가장 먼저 일어나는 감정이나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주체의 자아 또는 관찰자로서의 또 다른 내가 현명한 판단을 해서 선택, 실행하면 좀 더 자존감 있는 안온한 마음의 실행자가 되지 않을까? 그런 나날이 이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주체적 삶이 아닌가 말이다.
버젓이 메뉴판에 있는 수많은 음식들처럼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나, 이를 테면 김헤롱, 김아야, 김과묵, 김허당, 김폭망 이런 애들처럼 말이다. 이 아이들의 일상에 떠오르는 수많은 마음도 결국 선택의 문제 아닐까?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인간의 신체부위 중 유일하게 성형할 수 없는 곳. 눈빛!
유일하게 바꿀 수 있는 건 자신의 마음가짐과 태도!"
역시 기억력 짧은 헤롱은 누구 인지는 모르나 누구인가 한말은 제법 기억하는 신통한 능력이 있다.
옳거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은 나름의 해법을 찾는다. (다들 이미 그러구 살고 있는데 나만 아직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예슨이 낼모레인 또래 인류중 나만 아직 초딩인가? 그런건가? 그렇다면 또다시 더 이상 뭐 할 말은 없다.)
어쨌거나 어느 날, 헤롱은 결의에 가득 찬 약간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고등어, 한 마리 주세요." 외친다. 고등어는 혼자먹기에 적당한 크기다.
당황한 사장님은 머뭇거린다. "아니, 등푸른 고등어 한 마리 주세요." 확실한 결정타를 날린다.
사장님이 거부하면 대판 더 큰 목소리라도 나올 기세다. 주체적 자아가 나선 것이다.
헤롱의 호랑이 눈빛을 본 사장님은 하는 수 없이 수락한다. 2인분에서 1인분의 삶도 인정을 받는 순간이다.
다만, 나도 그리 진상 손님은 아니다. 손님이 없는 시간대에 가거나 한 시간 정도의 시간 내로 먹고 계산하고
나오니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상도의는 나름 지키고 있는 셈이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작은 소소한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 나의 욕구도 충족하고 슬기롭게 해결하는 일이 일상에서 소소히 일어나고 있다. 이는 당연히, 글쓰기와 글쓰기 모임 (라라 크루)의 효능 중 하나라는 나름의 분석도 곁들인다.
이번 글쓰기 모임은 제법 멋진 여행이 될 듯싶다.
헤롱이가 점점 욕구와 충족을 해결하는 나름의 지혜를 찾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아! 수많은 자아 중 어렵사리 발견한 아이가 또 있다. 유쾌한 아이다. 아직 이름을 안 지어 줬으니
서둘러 이름을 명명한다. "김발랄"이다. 오늘도 내가 선택한 마음의 메뉴는 유쾌다. 김발랄이다.
그날 이후로,
헤롱이 삼치집에 들어서면 주문을 하지 않아도 사장님은 자동으로 고등어구이를 내어 주신다.
헤롱이 삼치집에서 고등어구이(만) 먹는 이유다.
먼 동해바다의 등 푸른 바다와 하늘을 머금고 살아온 고등어를 이슬과 함께하게 되면서
이슬은 등 푸른 동해가 된다.
헤롱은 동해를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