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자체보다는 술자리 또는 술자리 분위기를 좋아한다."
헤롱이 뜬금없는 고백의 글을 쓰려하자, 친구들이 들고 일어난다.
실제로 망치나 각목이나 태극기나 촛불이나 그런 뭘 들고 일어나는 건 아니다. 그저 "허이구야. 뭐? 술을 안 좋아한다고? 허구한 날 술독에 퐁당퐁당 잠겨 살던 너란 인간이, 하물며 작가라고 사칭하는 녀석이 새빨간 거짓말을 하며 독자들을 기만하려 한다니. 이 엄청난 사기행각을 전국의 독자들에게 알리고 헤롱을 관련 법규에
의거, 엄하게 처단..."
이라며 들불같이 봉기하여 성토를 한다는 의미이다.
술 이야기. 이슬 이야기를 조금씩 써왔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써나갈 것이지만(? 그런 확신은 할 수없지만),
이 시점에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포인트가 있다.
해롱은 사실, 원래, 애초에 술이 약했다. 아주 매우 약했다.
다만, 알코올의 화학작용을 오롯이 영롱한 정신력 하나로 줄기차게 버텨왔을 뿐이다. 정신력의 끝판왕이다.
인하대 3대주당 운운하며 외부에 알려지기로는 인천의 엄청난 술꾼으로 알려져 있다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완전히 다른 얘기가 펼쳐진다.
뭐하나 특별나게 잘하는 거 없고, 빼어난 외모도 아니고 이도 저도 아닌 그저 어리숙하고 애매한 특질? 에 헤롱은 스스로 오래도록 이상한 열등감에 시달려왔다. 특히나,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한 열패감 가득했던 학창
시절엔 그 증상이 심해서 그저 오로지 술이라도 잘 먹자. 그런 척이라도 해보자.라는 이상한 인정을 갈구하였다. 어이상실, 어처구니, 황당무계와 어울리는 이상한 인정 욕구이지만 왜 이런 생각을 하고 행했는지는 사실 간단하다.
이슬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주법 1조 1항의 문장처럼, 술은 마음의 장벽을 허물고 가면을 벗기고 한없이 열린 상태로 이끌어 모두가 동등한 입장에서 마음과 감정교류가 가능하다는 것이 최고의 효능 일터이니, 그런 상황이 되면 이성의 탄탄한 사슬이 풀리고 각자 본연의 깊은 속내를 여과 없이 표현하거나 분출하게 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다. 헤롱의 주당 역사 초창기, 이런저런 술자리에서 최대한 정신줄을 붙잡고 알코올과의 집요한 사투를 벌이며 이슬 9단의 이미지 메이킹과 탄탄한 주력 연마에 심혈을 기울이던 즈음, 이런 서로 간에 오픈된 상황 때마다 사람들은 헤롱에게 속 깊은 이야기, 꽁꽁 숨겨있던 내면의 이야기들을 가감 없이 풀어내기 시작한다.
헤롱은 그런 게, 그런 상황이 좋았다.
비록 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지만, 진실을 또는 진심을 서로 마주하는 시간. 그런 시간이 좋았다.
이러다 보니 헤롱에게 뜻하지 않게 고민상담사, 심리 상담사라는 부캐가 형성되었고, 말수 적고 입무거운 헤롱은 다양한 고민을 털어놓아도 안심되고 뒤탈 없음이 보장되는 믿을만한 상담사로 포지셔닝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청춘들의 고민은 말해 뭐해 단연코 연애다.
연애라고는 1도 해본 적 없는 쑥맥 헤롱은 그저 고딩시절 빠져있던 세계문학, 한국문학의 넘치고 넘치는 러브스토리를 참고삼아 나름 진심가득, 공감만땅, 찰진조언의 상담사례를 차곡차곡 쌓았고, 입소문은 소리 소문 없이 금세 퍼졌으며, 얼마 가지 않아 '문학적 소양을 갖춘 공대생 연애상담사'로 주변에 명망을 떨치게 되었다. 남학생, 여학생 가릴 것 없이 헤롱에게 연애상담이 물밀듯이 밀려오던 시절이다.
대학 1 ~ 3 학년 시절이니 뭐 그리 높은 수준의 상담은 아니었겠지만, 이 당시 혜롱이 연애상담을 해준 커플들이 나중에 실제 부부가 된 경우도 꽤 있으니 그냥 장난 삼아하던 상담사 놀이만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상담료는 무료다. 국가공인자격증 그런 건 있을 리 없으니 사짜 상담사가 상담료조로 금품이라도 받았다가는 곧바로 철컹철컹이다. 그저 한 가지 유일한 조건으로서 클라이언트는 예외없이 헤롱에게 이슬 한잔 사는 거다. (하여튼, 술 얻어먹는 요령도 참신하고 발랄하다.)
그거면 충분하다. 일명 진료비용이다.
진실의 방에 빠른 속도로 도달키위한 최소한의 비용이다. 맨 정신엔 하기 힘든 용기를 끌어올리는 최고의
부스터이다. 그러다 보니, 클라이언트의 고민을 편안한 심적 상태에서 부담 가지 않게 끌어내려면 같이, 같은 량의 이슬을 마시되 취해선 안된다. 취하면 전문적인 상담을 못하니 또렷한 정신줄은 잔이 거듭될수록 오히려 생생 또렷해진다. 자연스럽게 주력이 늘 수밖에...
다시 친구들에게 고한다.
다시 정확히 말하자면, 술 자체보다는 술자리, 술자리 분위기. 아니 사람. 그 내면의 본질에 가까워진 사람
자체가 좋아서 그리도 마셨다는 게 오늘의 키워딩이다.
(친구들아. 이제 좀 납득이 되느냐? 그저 이 인간, 단순한 알코올 환자라 의심했던 오해는 풀어라.
그래도 이해가 안 된다면 개별 연락 줘라. 이슬 한잔하며 찬찬히 설명하리다.)
어느 가을의 얘기다.
여러 클라이언트들의 상담내용이 유독 한 사람을 향하는 애모의 마음으로 가득하던 희한한 사건이 계속 이어졌다. 그 상담들은 이렇게 시작된다.
"내가 말이야..."
"요즘 말이야..."
"너만 알아야 돼..."
"나의 이런 마음이 가당키나 하겠니?..."
선배, 동기, 심지어 후배들 까지도... 숫하게 많은 남학생들의 그 애타는 마음을 호소하던 흠모의 대상은 다름 아닌 국문과 J 였다. 헤롱과는 영어회화반 동아리 동기다.
화려하고 현란한 미모와는 약간 방향이 다른, 계란형 얼굴과 새하얀 피부에 나긋나긋한 목소리 하며 생그럽고 해맑은 미소, 동그라니 귀여운 안경, 단아한 분위기. 전형적인 동양의 미, 한국적 아름다움을 갖춘 미인이다. 게다가 국문과라니...
수많은 머스마들의 흠모의 대상이 된 건 뭐라 탓할일이 아니다만 덩달아 상담 일감이 밀려오는 통에 애꿎은 헤롱만 연일 연타석 상담 술자리에 허덕허덕 헤롱헤롱 거려야만 했다.
하다 하다 나중엔 신경질이 나서, 모든 클라이언트에게 동일한 어조의 얘기를 해줬다.
"하이고. 이 심약한 인간아. 용기 있는 자 미인을 얻는다 하잖냐. 사내답게 고백하고 사랑을 구해. 정면돌파!"
그러나, 이후에도 상담 요청은 끊이지 않았고, 고백에 응답받지 못한 가련한 청춘들의 AS상담을 해주느라
꽤나 오래 시달리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쟤는 어지간하면 그 중에 괜찮은 놈 받아주던가, 가타부타 답을 주던가 하지. 이게 서로 간에 무슨
고생이냐..."
그러던 어느 날,
쪽지가 하나 들어왔다. 동아리방 메모쪽지를 꽂아놓던 벽보판에서다. (요즘같이 SNS, 인터넷 이런 거 없던 시절이니까 서로 간의 소통은 벽보판과 '마음의 게시판'이라는 공책이 유일하다.)
"헤롱아. 몇날 몇일 몇시 후문가 마당 커피숍에서 좀 보자!"
헛.
'얘가 알게 된 건가, 내가 연애상담이랍시고 쓸데없이 자기 얘기하고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그래서 야단 한 사발 퍼부으려나? 아니면 내 명성을 듣고 자기도 상담을 받으려는 건가?' 살짝 긴장한 헤롱은 거의 매일 드나들던 음악다방 '마당'의 드르륵 문을 열고 입장한다.
마당 커피숍 사장님은 헤롱의 친구 어머님이시다.
"왔냐? 헤롱아. 뭐주랴. 오늘도 해장 쌍화탕이냐? 술 좀 작작 마시거라. 이눔아."
어머님께 살가운 눈인사를 보내는 사이, 저 구석에서 누군가 손을 흔든다.
"헤롱아. 여기야~"
J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