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롱 : "웬일이냐?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J : "아니, 그냥 이런저런 할 얘기가 있어서..."
동아리방에서도 워낙 과묵 9단인 헤롱인지라 J와는 그저 인사 정도만 하는 사이였으니 살짝 침묵이 흐른다.
마침, 계란 동동 쌍화탕과 다방커피를 탁자에 내려놓으시면서 친구 어머니는 씨익 웃으신다.
어머니: "어이구.헤롱이 네가 원일이냐? 여자 친구가 다 생기고? 술 먹기도 바쁠 텐데 연애는 언제 한거야?
헤롱 : "아니요. 아니요. 여자 친구 아니고 친구예요. 친구!"
어머니 : "알아 알아. 부끄러워하기는. 짜식. 다들 처음엔 그리 얘기하더라."
어머니는 J에게 눈찡끗하고는 주방으로 유턴하신다.
J는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생글생글 미소만 짓고 있다.
간단한 스몰 톡을 건넨 헤롱은, 보자고 한 J의 메인 톡이 무언지 성급히 묻지 않는다. 자연스레 하고 싶은 얘기를 꺼낼 시점까지 기다린다.
헤롱은 그 시절, 스스로의 사명을 '집안의 가난 탈피'와 '국가의 민주주의 수립' 딱 두 가지로 정하고 몰두하던 때라, '연애 또는 이성에 대한 관심은 나에겐 사치다, '라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그 유명한 미인 J를 바로 코앞에서 만나고 있어도 별반 마음의 동요나 설렘이나 일말의 호기심이나 그런 건 있을 리 만무.
그저 저 여학생은 동아리 동기일 뿐이다. 다만 연애상담에 J 가 단골로 등장하는 시점인 터라, 혹여나 클라이언트들이 내 말을 전해서 오늘은 J 에게 야단맞는 자리냐 라는 걱정만 있을 뿐. (따지고 보면 헤롱이 야단맞을 일은 아닌데도 말이다.)
J 가 본론으로 들어간다.
J : "얼마 전에 동아리방에 '마음의 게시판'이라는 공책에서 네가 쓴 글을 보았어. 너, 제법이던데?"
헤롱 : (전혀 예상치 못한 본론에 순간 당황하며) " 어? 어. 그거 그냥 심심해서 몇 줄 써본 건데..."
J : "너 원래 책 많이 읽지. 딱 보면 알거든. 요즘 무슨 책 읽어?"
헤롱 : "어? 어. 교류회로, 전자공학, 퀀텀 피직스 그런거지."
J : "아니 그런 전공책 말고..."
(역시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인가? 그럼 나도 선수인 건가? 그럼 아까의 입장은 선수입장인건가?)
주로 읽던 저자나 책이나 계간지 등등 대충 얘기했더니, 역시 국문과답게 엄청난 관심을 표하며 몸을 앞으로 바짝 끌어당겨 앉는다.
......(중략)
이후의 대화는 문학적!......
대화는 제법 재미난 이야기로 이어졌고 헤롱은 생각한다.
'역시 국문학도는 다르구나. 공돌 사내 녀석들과는 완전히 사고 구조가 다른데? 어떻게 저런 사유를 하는 거지? 그래 얘는 뇌도 예뻐서 그런 거겠지. 뇌도 예쁘고 볼일이구나.'
이제 강의시간이 임박해서 가야 한다며, J는 한마디를 추가한다.
J : "이번 주말에 연극 보러 가지 않을래? 어디서 표를 얻었는데 혼자 가긴 그렇고, 버리긴 아깝고 해서."
헤롱 : "너 남자 친구랑 가면 되잖아."
J : "내가 남자 친구가 어딨니? 너랑 가면 편할 것 같아서."
헤롱 : "어? 어. 그래 그럼 알았어. 그날 보자." (친구끼리 연극 보러 가자는데 뭐...)
이리하여, 헤롱은 난생처음 연극이라는 걸, 그것도 이성과, 그것도 서울 한복판의 근사한 공연장에서 보게 되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암울했던 시대이니만큼 민주화 운동 관련된 주제의 연극이었다.
맨 앞자리 S석 1열 센터 자리에 헤롱과 J 가 앉아있다.
연극이 중반으로 흐를 즈음, 갑자기 모든 통로에서 웬 아저씨들과 경찰관들이 뛰쳐나오며,
"연극을 당장 중단하시오. 지금 당장!" 쩌렁쩌렁 소리를 지른다.
"당신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현장 체포한다"며 배우들을 한구석으로 몰아붙인다.
"당신들도 함께 체포하니 모두 꼼짝들 마시오!" 관객들을 향해서도 엄포를 놓는다.
"이봐 거기. 출입문 모두 잠가"
J : "어머 어떡해..." (옆자리 헤롱의 팔을 붙들고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다.)
헤롱 : "너무 걱정 말어. J 야. 설마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잡아가겠어? 연극이 뭐 그리 심각한 내용도
아니구만" (역시 사내다. 이 사내 탐난다. 당황스러운 순간에도 감정의 흔들림은 없다. 이런 담대함
은 백골단 닭장차에 하도 끌려가, 하도 두들겨 맞던 경험으로 얻은 이골이다. 다만 일이 좀 복잡해
지겠다는 짜증뿐.)
J : "헤롱아,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헤롱 : "아니야, 아니야, 걱정 말고 상황을 지켜보자꾸나. 운동화 단디 신고 있어. 뛰어야 할지도 모르니.
내 팔 꽉 잡고."
잠시 후,
이 모든 상황 또한 연극 연출의 일부이며 사방팔방에서 튀어나온 아저씨, 경찰관들 모두가 배우라는 사실이 곧 알려졌고, 연극은 계속 진행된다. 국민들의 표현의 자유도 군부정권으로부터 억압받을 수 있다는 시대의 엄혹함을 문화예술적으로 표현한 거라나 뭐라나.
'하... 욕 나올 뻔했네... 진짜... 이 연극 감독 누구야? 깜놀 연출도 정도껏 해야지!' 라며 따지려 들다가...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서프라이즈는 고맙지 말이다.
J가 눈물범벅이 되어 헤롱의 어깨에 거의 대롱대롱 안겨있다시피 했으니까 말이다.
그때다.
내 어깨를 붙들고 가녀린 떨림을 전하는 여자 사람이라니! 이 새로운 상황 인식이 헤롱의 뇌를 깨운다.
경찰관들, 무서운 아저씨들이 튀어나올 때도 놀라움보다는 짜증만 만발했지 조용했던 내 심장.
갑자기 콩닥콩닥 가슴에서 뛰기 시작한 심장은
갑자기 쿵쾅쿵쾅 소리가 머리에서 나기 시작한다.
귀가 멀 지경이다. (이런표현을 어느 책에서 본듯한데 지금 그걸 기억하려 애쓰는건 무척이나 어리석은 일이다.) 놀란 심장을 진정시켜야한다.
'어... 어라.. 이거 왜 이러지?...' 도대체 멈추지 않는다. 얼굴은 불타는 고구마다.
헤롱은 연극이고 나발이고 어서 밖에 나가 시원한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다.
아이고, 이 범생아.
아이고. 이 모쏠아.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