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은편에는 중국 바이어 사장(CEO : 왕서방)이 앉아있고 좌우로 한 명씩 임원진이 포석해있다. 한국 측에서는 나와 통역 단 두 명뿐이다. 출입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중앙 자리에 앉는 사람이 그 술자리의 주인. 호스트이다. 즉, 이 저녁 술자리는 왕서방이 쏘는 자리임을 의미한다.
그 정도 술자리 상식은 중국 생활 1년이 넘어가던 김헤롱에게는 낫 놓고 기역자 쓰기다.
시간은 저녁 어스름한 6시, 장소는 중국 청도의 고급진 식당이다.
술이 나온다. 그 유명한 마오타이주. 백주다. (주로 '빠이주'라 불린다.) 알코올 도수 50도가 넘어가고 가격도 상당히 비싼 술이다. 붉은색 또렷한 상표와 봉인된 마개가 그것이 진품임을 알린다.
칭따오 맥주 스무 병이 이미 비어져 구석에 쌓여있지만 그 정도는 입가심이다.
마오타이주가 테이블에 놓이면서 잠깐의 적막과 함께, 서로 간에 긴장선이 흐른다. 팽팽하다.
드디어 메인이벤트의 서막이 올랐다. 일명 <안녕! 이슬아>의 글로벌 버전이다.
아침 10시 바이어 사무실에서 만나 무려 8시간 동안 차나 마시고, 이런저런 스몰 톡 (가벼운 대화)으로만 일관하던 바이어 왕서방은 저녁 술자리를 빌어 본격적인 사업 논의를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뜸을 들이려는 상대방의 전술에 김헤롱은 '이러다 밥 탄다. 이 눔 들아' 하면서 속이 바짝바짝 새카맣게 타들어 갔지만 절대로 내색은 안 한다.
쥐고 있는 패나 카드를 먼저 내보이는 측이 약세일 수밖에... 비즈니스 테이블에서 조급함은 금물이다.
(조선족) 통역은 이미 꽐라 상태로 엎어져 있다. 순간 김헤롱은 당황했지만 역시 내색하지 않는다.
1년이 넘도록 중국 생활을 하면서도 할 수 있는 중국말은 극히 제한적이다. 쇼우지엔 짜이나? (화장실 어디예요?) 피엔이 이디알 (깎아 주세요.) 팅부동 팅부동 (몰라요. 몰라요) 정도다.
통역이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다 보니 좀처럼 중국어 실력이 늘지 않았고 이런 중요한 시점에 이런 젠장.
참으로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잠시 후, 세명이 더 들어오며 인사를 한다. 왕서방 회사의 거래처 사장들이란다. 새로 인사 소개한 한 세 인간은 보다 공격적으로 빠이주를 나에게 권커니 작커니한다. 그중 한 명이 영어가 되어 간단한 의사소통을 이어간다. 술자리가 어느새 5:1이다. 대학생 어느 방학 때 알바를 뛰던 어느 공장에서 현장 직원들과 전설의 17:1 술 먹기 시합에서 당당히 승리의 트로피를 거머쥔 화려한 전력의 김헤롱에게는 이 정도는 아직 초반전이다.
여유롭게 대작을 한다. 흔들림이란 없다.
또 잠시 후, 다섯 명이 들어온다. 이젠 10:1이다. 말로만 듣던 중국의 필살기. 인해전술이다.
그럼에도 김헤롱은 선전을 펼친다. 상대 진영에는 이미 엎어지고 쓰러지고 전사자가 속출한다.
사람을 떠보려거나 간을 보려는 수작질은 통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가? 평생을 이슬로 갈고닦은 주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또또 잠시 후 왕서방의 와이프와 딸이 들어온다. 으잉? 이거 뭐 직장 + 거래처 + 가족 단체 회식하는 자리인가? 뭐 하자는 시추에이션인지 잠시 숨을 고른 헤롱은 순간 올라오는 통증에 움찔한다.
워낙 센 알코올 도수에 목이 타들어가는 증상이다. 타는 목마름이다. 아뿔싸. 이건 이슬이 아니지.
목은 쓰리고 마귀처럼 달라붙어 술잔을 돌리는 인간들이 점점 좀비로 보이기 시작한다.
아... 이렇게 천하의 김헤롱이 여기서 무너지는가? 점점 체력도 딸림이 느껴진다.. 술은 체력이 받쳐줘야 마땅한데. 큰일이다. 아군은 없으니 단기필마로 이 위기를 넘어서야 한다.
삶의 위기 때마다 찾는 분이 계시다.
아버지다.
김헤롱 : '아버지, 이럴 땐 어쩌죠?'
아버지 : '판을 뒤집어라. 이대로 계속 끌려가선 안돼. 정신 똑바로 차려라. 아들아.'
그렇지. 상황 전환이 필요한시점이다.
갑자기 벌떡 일어선 김헤롱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제목은 월양대표 아적심.
타국에서 힘들고 괴로울 적마다 고향을 그리며 종종 불렀던 노래... 그 노래다. 나지막이 흐르는 중저음 보이스에 시끌벅적했던 좌중은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이 넘실거린다. 돌아가던 술잔은 멈추고 이제 감상의 시간이다.
왕서방 와이프와 딸의 눈에는 한국에서 온 희한한 아저씨에게 이미 하트 뿅뿅이다.
가까스로 시간을 번 헤롱은 장윤정 트위스트와 엄정화의 포이즌을 소환하며 그 기세를 휘몰아친다.
방마다 있는 노래방 기기에는 한국 노래 천지다. 이것이 문화강국의 힘이다.
태풍처럼 몰아치는 K-트로트, K-팝 휘몰이 장단에 좌중은 흥겨운 축제 한마당이 되었고, 꽐라 된 자들의 듣도보도 못한 중국 노래들로 시끄럽게 이어진다. 급기야 왕서방도 술잔을 기울인다. 이때다!
헤롱은 왕서방 부부의 블루스를 권한다. 물론 배경음악은 헤롱이 부른다. 타는 목을 부여잡고. 하우캔 아이 세이 투유. 아이럽 썸바디뉴. 서양 노래다. 제목은 기억이 안 난다. 이 노래는 대학 1학년 첫 과단체 미팅 때 영등포 역전 해바라기 디스코텍에서 첫 만난 어느 이름 모를 여학생과의 블루스 타임. 그때 흘러나온 노래다.
다른 중요한 역사는 가물가물하지만, 이런 역사는 기가 막히게 기억난다. 그 여학생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이 노래를 수십 년이 흐른 뒤, 타국 땅에서 내가 부르고 있다니...
영등포에서 칭따오로. 기가 막힌 연결성이다.
왕서방 부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제법 블루스 스텝을 밟는다.칭따오 블루스탄생의 순간이다.
왕서방의 이런 모습 처음이라며 좌중은 난리 아우성이다. 사회주의 국가에 이런 말랑말랑함은 그들에겐 어쩌면 낯선 감성일 테니그저 신기할 뿐이었겠지.
대세는 이미 내 것으로 가져왔으니 이제 결정타만 남았다. 이번에 헤롱은 왕서방 부부의 러브샷을 권한다.
그게 뭔지 모르는 그들에게 딸이 나선다. 한국 드라마에서 봤다며 엄마 아빠에게 팔을 서로 걸고 마시는 자세를 알려준다. 아무렴. 모르면 아이에게도 배워야 하는 법이지.
러브샷의 신세계에 빠져버린 왕서방은 본격적으로 마신다. 벌컥벌컥.
한숨 돌린 헤롱은 슬슬 술자리 평정에 들어간다. 이미 맛이 간 병사들은 한 손가락으로 툭 밀쳐내고,
끝까지 버티려는 장군들에게는 강렬한 눈빛으로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까불래?
사업이고 나발이고 이젠 사나이들의 자존심 싸움이다. 그 싸움에 국가의 경계선은 없다.
오로지 승자의 부드러운 존엄과 패자의 깨끗한 굴복만 있을 뿐. 비디오 재판독 같은 불복은 없다.
객기에 가까운 어이없음이지만 이것이 남자들의 세계다.
남자들이란 국경을 초월하여 참으로 단순 단세포 아메바 히드라 미토콘트리아다.
패장들은이윽고 고개를 떨구고 눈길을 피한다. 현장을 접수한 헤롱은 마지막 담판을 지으러 왕서방에게 다가간다. 그 걸음걸이는 자꾸만 흔들렸지만,
헤롱의 눈빛은 호랑이의 눈동자처럼 고독했고 이슬의 눈동자처럼 영롱했다.(어렸을적, 집안에서 부르던 내 이름은 따로 있었다. '호범'이다. 호랑이 호 자에 범범 자 였겠지.)
그래. 빠이주가 아무리 쎄다한들 어찌 이슬의 아우라를 넘보려 하느뇨...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가 언제나 나의 뒤편에 든든히 계시고,
이슬은 언제나 나에게 호랑이의 고독과 차분한 지혜를 채워준다.
(호)범 내려온다.
나는 대한민국이다.
왕서방이 눈앞에 가까이 보인다.
뚜벅뚜벅.
이제 클로징의 시간이다.
PS : 사업 또는 출장으로 여러 나라를 가 보았다. 약 30 여개국 정도 되고, 거의 대부분 비즈니스 트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