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먹고, 겨울은 탄다.

by 김호섭

얼얼하고 화끈하며

꽉 찬 맛이 한톨 빈틈없이 깔끔하다.

이리저리 에둘러 양념과 조미료간으로 어설피 승부하는 맛이 아니다.

허술함 없는 안쪽 꽉 찬 직구 같은 맛이다.

묵직하다.

첫 느낌보다는 끝 느낌이 훨씬 강력하다.

미세한 뇌세포를 꽝 때리며 시작되어

온몸으로 퍼지는 짜릿한 맛의 향연에

사람들은

어질어질 절레절레 황홀경에 빠진다.

이 맛의 유혹에 제정신을 잃기도 한다.

집 나간 며느리도 사위도 돌아올지 모른다.

요리의 대가 백종원 선생도, 이연복 선생도

이 맛을 요리하진 못한다.

사시사철 이 맛을 즐길 순 없고

여름철 폭염의 계절에나 겨우 맛볼 수 있다.

이 쨍한 맛은 분명 제철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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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위다.



더위 먹었다.

두루두루 가지가지 참 여러 가지 한다.

담에서 냉방병으로 다시 더위병으로 이어지는 잔병치레.

이 여름에 찾아온 반갑지 않은 친구들이다.

고만하자. 친구들아. 마이 묵었다 아이가.


7말 8초 여름휴가를 앞두고 30도가 넘어가는 땡볕에 운동을 많이 했다.

그 운동은 공원에서 진행되는 '어르신 건강 에어로빅'이다. 강사님이 여름맞이 신곡 댄스를 새로이 발표했는데 너무 신나서 그만... 에바다. 에너지 오바다. 과유불급이다.

강사님을 탓할 일은 아니다. 음악과 흥의 문제만도 아니다.

더위다. 저녁에도 32도. 덥다.


더위 먹었다.

호로록 후루룩 야미야미 냠냠.

오징어 짬뽕 큰 사발같은 하늘에 뜨거운 밥 닮은 구름 곁들여 말아먹었다.

인간아. 먹을 게 없어서 이젠 하다 하다 더위도 먹냐.

하긴, 나이도 먹고 욕도 먹으니까 더위라고 못 먹을 쏘냐.

인간은 참 다양하게 다채롭게 먹는다. 때론 학교 짱도 먹고 전설의 복서 홍수환처럼 챔피언도 먹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위는 먹고 추위는 탄다.

추위는 안먹고 탄단다. 외국인들 안 헷갈리게 한국어의 글로벌 표준 설정이 시급하다. 추위도 먹자.

아니다.

가을 타나 봐, 봄 타나 봐, 더위 타나 봐 이런 말도 노래도 있으니 대세는 '탄다'이다.

먹는다는 표현이 허락된 건 오롯이 더위뿐.

그 귀한 더위를 먹었으니 계절에 민감한 아야에게는 어쩌면 온당하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겠다.


동네 약사는 이렇게 말한다.

"더위 먹으셨으니 생맥을 마셔야 합니다."

"네? 치킨에는 맥주를 곁들여야 제맛이다. 할 때 그 맥주. 생맥. 드래프트 비어. 그걸 마셔야 된다구요?

여자 친구가, 집에 바래다준 남자 친구에게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하는 말, 라면 먹고 생맥 한잔하고 갈래? 할 때 그 생맥이요?

그 시원이, 그 낭만의 흰 거품이 철철 넘쳐흐르는 생맥이요?"

"허이구, 이 양반이 더위 먹은 게 확실하군.

뒤를 보세요. 아니 저기 거기 '생맥'이라고 쓰여 있잖아요.

아니 거기 말고 저기요."

약사가 검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고, 한참이나 헤매던 아야는 결국 자기 검지를 약사의 검지에 맞대어 그 허공의 직선을 그리며 쫓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까운 곳에 있는 물건을 잘 찾지 못하는 천상 남자이기 때문이다.

생맥은 이것이다.

별 희한한 인간 다 보네 하면서 실실 웃는 약사는 설명한다.

"생맥차라고 합니다. 인삼, 오미자, 맥문동을 다린 차로서, 주요 효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삼으로 기운을 북돋아 체력을 올려주고

오미자는 열을 식히고 땀을 멎게 도와주며 피로 해소에도 도움이 주고

맥문동은 몸속에 진액을 형성하여 체액 고갈로 인한 갈증을 해소시켜 주며 기침을 예방하지요."

생맥차 두봉을 마신 아야는 줄곧 잠이 쏟아진다. 어디 빨빨 거리며 쏘다니다 더위 먹지 말고 잠이나 자라는

강제성 수면기능이 있는 듯하다. 하루가 지나자, 얼씨구 멀쩡하다.

약국으로 뛰어간다. 더 주세요. 생맥 두 잔을 아니 두봉을 더 들이킨 아야는


다음날, 떠난다. 바다로.

백만 년 만이다.


바다와 하늘이 깊고 높은 걸 보니

가을이 머지않았다.


가을엔 다시 가을을 타겠지.

겨울엔 다시 추위를 타겠지.

그러나 걱정 없다.

가을 타는데, 추위 타는 데는 이미 입증된 특효약이 있으니.


이슬이다. (방긋)


이렇게 생맥으로 여름을 나고,

이슬로 가을과 겨울을 나면 예슨이다.

아야와 헤롱은 함께 행복할 것이다.

청춘의 계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