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식은 오늘도 친구들과 답동성당으로 뛰어들었다. 동인천역 광장에서부터 "독재타도"를 줄기차게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경동사거리를 넘어서다가 사복 경찰, 공안 형사들에게 쫓기게 된 탓이다. 포위망은 좁혀오고 흐린 날씨였다. 최루탄의 희뿌연 연기는 동서남북을 한바탕 뒤섞어 놓았지만 창식과 친구들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고딕양식 종탑위의 십자가. 저 높은 곳에 떠 있는 선명한 기호는 아무리 어둡고 고된 날씨에도, 일상에도 그리고 시절에도 또렷이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주었다. 서울의 명동성당이 쫓기는 자들의 안식처였듯이.
다른 친구들은 전부 성당 안으로 뛰어들었지만 창식은 성당 앞 가톨릭 회관으로 방향을 튼다. "창식아. 어디가." 친구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창식이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가톨릭회관 지하 일층에 있는 커피숍이다. 몽마르뜨 커피숍. (그 당시 인천에서 원두 커피를 팔던 곳이 딱 두 곳이었는데 통일 다방 그리고 여기, 몽마르뜨 커피숍이다) 이 상황에 웬 커피인가. 창식은 카페 현관문을 지나 복도 끝 주방 쪽 문을 택한다. 턱수염 그윽한 바리스타 아저씨와 눈빛교환을 나누자마자 아저씨는 홀에 있는 알바생에게 수신호를 보낸다. 긴급이다. 알바생은 흐트러짐없는 자연스런 동작으로 주방으로 다가와 창식을 더 깊은 곳으로 숨긴다. "창식아. 어서 이쪽으로!" 창식은 재료창고 안에서 자신도 커피의 재료인 양 어두운 색깔로 몸을 웅크린다. 진땀과 바튼 숨을 동시에 쏟아낸다. 어깨에서는 더운 피가 흐른다. 의무병 출신인 턱수염이 앞치마를 찢어 지혈을 시작한다.
상아는 오늘도 대기줄에 서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웨이팅 라인은 한 시간이 넘어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상아가 뾰족구두 신고 꼿꼿이 서있는 이유는 그당시 그렇게나 귀하다는 원두커피를 접할 수 있고, 연예인 누구 닮은 훈훈한 알바생이 서빙을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정도 수고는 고생도 아니다. 넓직한 공간에 흐르는 근사한 클래식 선율도 좋지만 원두를 음미하며 하염없이 알바생을 쳐다보는 것이 상아는 그저 좋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훈훈한 알바생은 비 오는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 한 송이까지 내어 준다니, 설탕 두 스푼에 낭만 한 스푼이다. 향기로운 장미도 좋지만 짧은 순간 건네는 그의 미소는 장미보다 치명적이며 원빈보다 살인적이다. 자신이 마치 그의 연인이 된 듯 몽롱함에 빠질 정도로 황홀 하고 매력적인 시간의 공간이다.
수많은 여인들이 그렇게나 북적이던 명소, 몽마르뜨에 어느 날부턴가 거짓말처럼 썰렁한 날이 왔다. 알바생이 보이질 않는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알바생이 운동권 학생들을 이리저리 숨겨 준 사실이 탄로나 갑작스레 군대에 끌려갔다고 한다. 최전방 G.O.P 강원도 철원 D.M.Z 어드메쯤... 상아는 몽마르뜨 언덕에서 오래도록 머물다가 용동 고갯마루 너머로 사라졌다. 그녀의 여린 어깨 위로 깊은 노을이 내려 앉았다.
그 이후로 몽마르뜨는 전성기를 지나 쇠퇴의 길로 들어
섰다는 사실은 인천의 커피계, 서빙계, 알바계에 널리 회자되었고 전설로 남게되었다. 창식과 상아 그리고 알바생의 젊은 시절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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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신포국제시장 맞은편에는 답동성당이 있습니다. 지금은 주차장과 부대시설로 바뀌었지만, 80년대에는 성당 앞 마당 바로 그 자리에 가톨릭 회관이라는 건물이 있었죠.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인천 대학생들의 은신처 또는 아지트였습니다. 그 건물 지하 몽마르뜨 커피숍의 마스코트. 훈훈한 알바생, 왼손에는 언제나 장미향이 오른손에는 친근한 이슬향이 난다던 향기로운 녀석, 연예인 누구를 닮았다던 대학생. 네. 맞아요. 접니다. 20대, 파르라니 젊었던 문학 소년입니다.
오늘은 그때의 저를 만나고 왔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와 온갖 전등이 반짝이는 멋진 장소로 변하고 젊은 날의 흔적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기억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그 기억은 빛바랜 추억의 과거가 아니라 생생하고 선명하게 살아 숨쉬는 현재입니다. 고통도 아픔도 설레임도 모두 기억의 세포에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이렇게 긴 호흡으로 보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경계가 사실 무의미해지기도 합니다. 황현산 선생이 <<밤이 선생이다>> 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요.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선생의 말씀처럼 현재의 두께가 두꺼울수록 타인과 시대의 아픔을 좀 더 헤아리게 되고, 공감의 밀도 또한 깊어지리라 생각해 봅니다. 폭이 넓은 강이 많은 이야기를 품듯이 말이죠.
가난했으나 훈훈했던 그때의 나를 포근히 안아주고 왔습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환갑이 넘어서도 너는 여전히 훈훈하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가난을 탈피하지는 못했지만 가난함마저 글로 쓰는 멋진 신사가 될거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어느새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한 해가 다가옵니다. 가는 해도 오는 해도 연속되는 오늘입니다. 오늘도 가난했지만 올 한 해도 행복했습니다. 새해에도 가난함을 쉽게 벗어날 수는 없겠지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가난하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것들을 쓰면 되니까요. 그 일은 내가 바라보는 현재의 두께가 조금 더 두텁고 깊어지는 길에 이르는 여정이겠다는 생각도 잠시 해 봅니다.
벗님들께 미리 인사 올립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이어!
훈훈한 연말연시 되소서.
(자신이 훈훈했으며 여전히 훈훈하다고 주장하는
이 뻔뻔함은 용서하소서)
80년대 정해인
문학 소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