꺽여진 신호등

by 김호섭

얼마 전 출근길이다.

평소 같으면 집에서 회사까지 15분 정도면 여유 있게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월요일도 아닌데 교통체증이 엄청나다. 차들이 전혀 움직이질 못하는 상황.

전방에 사고가 났는가? 어느 회사에서 대규모 노사분규 중인가? 염려하던 전쟁이 터졌나?

멀리 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CNN Breaking News를 틀어본다. 네OO 뉴스속보, YOO 실시간 뉴스... 모두 조용하다.

하기사, 인천 변두리 삭막한 공단지역의 도로 사정은 그들에겐 관심 밖이겠지.




사람들은 빵빵거리고, 소리치고 야단치고 아우성치고 욕치고 전화치고 난리법석들이다. 주변 직장인들의

대규모 지각사태가 100% 확실시되는 순간이다.

생생도 호랑이 같은 옛날 사람 사장님의 무시무시한 얼굴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휘휘 저으며 그 버거운 이미지의 잔상을 애써 털어낸다. 평소, 부득이 지각을 할 때는 전화로 사전 보고를 하지만 이날은 왠지 전화도 안 한다. 에라 모르겠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뭐.

대신에 조수석에 언제나 놓여있는 책을 여유롭게 꺼내 들고 이 틈새시간을 독서의 시간으로 알차게

활용한다. 하여튼 이 인간. 희귀한 인간임에 틀림없다.


얼마 전에, 글쓰기 모임의 친절한 @이한나 작가님이 MBTI Test Link를 알려주셨다.

MBTI로 나의 복잡 심오하고 다채로운 성격을 한 가지 유형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울 걸. 하면서 그간 MBTI를 멀리 피해왔는데 그걸 모르면 요즘 어디 가서 사람들과 대화가 어렵다 하니 이참에 해본다. INFJ로 나온다.

희귀한 유형의 사람이란다. (그럴 줄 알았다.)


30분 넘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여 어느 지점에 이르자 알게 되었다.

신호등이 꺾여서 45도 각도로 차도에 떨어졌고 그 바람에 지나가던 승용차 1대가 지붕이 박살난채 부서져 있다. 다행히 운전자는 무사한 듯, 교통경찰 아저씨들과 사태 수습 중이다. 그 운전자는 얼마나 놀랬을까.

마른하늘에 벼락꽂치듯한 순간이었겠으니 후덜덜 대박 사건이다.

꺽여진 신호등이 4차선 도로의 3개 차선을 막고 있어 통행이 가능한 차선은 오로지 1개 차선.

교통체증은 당연했다.

무수히 많은 나날 동안, 더우나 추우나 공중에 매달려 열심히 빨. 노. 초 신호를 밝히며 교통의 흐름을 원활히 책임졌던 그 신호등은 갑작스러운 외부의 힘에 무력하게 꺾여 바닥으로 급전직하한거다.

그런데 오히려 이날은 교통체증의 원흉이 되어 운전자들의 욕을 먹고 있다. (사람들아. 그러는 거 아니다.)

외부의 힘은 지난밤에 불어댄 강력한 비바람이었겠지.




원활하게 흘러가던 우리의 일상도 때로는 예기치 못한 외부의 영향으로 멈춰 설 때가 있다. 꺽여진 신호등처럼, 코로나 사태처럼,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 사태처럼. 이렇게 외부의 영향은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고 개인도 회사도 나라도, 지구촌마저도 한순간에 멈추게 된다.

어찌할 것인가. 인류의 집단 지성과 시간의 힘에 의지할 수밖에...


한편으론,

어쩔 수 없이 혼자서 감당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은 내부의 영향이다. 마음이나 감정상태로 불린다.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는 무력감, 슬럼프, 좌절 그리고 불안과 공포, 또는 분노... 오만가지 어브노말한 내부의 영향으로 일상이 표류하거나 멈추거나 엄한 길로 흐르거나.. 때로는 마음에 심각한 생채기마저 생긴다.

마음의 신호등이 꺾여지거나 고장 난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라는 말처럼 마음의 흐름이 막히고 정체가 발생한 상황이겠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서 마주친 마음과 감정에 꽤나 오래도록 휘둘리고 아파하고 전전긍긍해온 파르라니 마음 여린 생생은, 글쓰기를 하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 모습의 핵심은 두 가지로 좁혀진다.


제법 회복탄력성이 생긴 걸? 제법 뻔뻔해지고 있는 걸?


켜켜이 쌓인 책 속에서 길을 찾아보고, 이 마음 저 감정 요 느낌은 무엇인가 자세히 보고, 메모하고, 글로 쓰고 하는 과정 속에서 허우적 빠져들던 그 녀석들의 정체가 풀리고 흘려보내는 시간의 속도가 예전과 다르다.

이것이 글쓰기의 효능인 건가?


마음의 흐름이 원활해지도록 낡거나 꺾인 신호등을 고치자. 여기서 교통경찰, 한전 직원, 수리기사의 역할은 오롯이 Self 다. 누가 와서 고쳐주지 않는다. 고치고 해결하는 것은 오로지 본인이다. 할 수 있다.


언제나 그린라이트 일수는 없는 것이 인생이기에 , 빨강도 노랑도 제때 적시에 켜지고 꺼지고 동작해야

마음의 4차선 도로는 흐른다. 여기서 저기로. 지금의 나에서 좀 더 좋은 나로. 좀 더 뻔뻔한 나로.




무려 한 시간이나 걸려 회사에 지각 도착한 생생은 더 이상 사장님의 노발대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1cm. 좀 더 뻔뻔해졌으니까.


사장님의 의자가 비어있다. 아직 출근 전 이시란다. 동료직원들의 전언에 의하면 전날 거래처와 술자리가

늦게까지 있었단다. 어라? 이게 웬 감사와 사랑의 순간인가?

점심 무렵 나타나신 사장님께 생생은 이렇게 묻는다.

"어제 과음하셨군요? 이젠 건강을 생각하셔야지요."

태연자약과 뻔뻔이 하늘을 찌른다.


그래. 오늘 신호등의 컬러는 이거다. "Green Light"


한줄 요약 : 마음의 신호등이 고장난 걸 모르고 있을 때는 이렇게 외치자. 빨! 노!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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