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문]
인천 서구에 위치한 천주교 인천교구 묘원이다.
조부모님과 아버지가 모셔계시다.
지난주 일요일에 찾아뵈었다. 코로나 여파로 성묘, 벌초가 금지된 이후 3년 만이다.
추석이 지난 지 오래고, 가을 초입이라 묘원은 한적하고 기온은 서늘하며 하늘은 저 멀리 높다.
코로나 기간 동안, 어르신들의 묘는 관리사무실에 의뢰하여 벌초를 맡겨온 덕분에 그럭저럭 양호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세분이 한 곳에 계시지 않고, 여러 곳에 분산되어 계시기에
우선, 할아버지 할머니께 예를 드리고 반대편 산기슭으로 이동한다.
아버지의 묘소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그간도 평안하셨는지요. 몇 년간 못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아들은 절부터 올린다.
'괜찮다. 아들아. 그나저나 나라에 심한 역병이 돌았다는데 식구들은 모두 잘 있느냐? 어머니 건강은 어떠시고?' 아버지는 가족들의 건강부터 챙기고 걱정하신다.
'가족들 모두 잘 지내고 있고, 어머니도 건강하십니다. 식사도 잘하시고 경로당에도 신나게 열심히 다니고
계시구요. 주말마다 찾아뵙고 병원도 모셔가고, 가끔 웃겨드리기도 하고 그리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그간에 못한 보고를 올린다.
손자의 결혼 소식, 손녀의 연애 소식, 큰 누이의 건강상태, 작은 누이네 새로 가족이 된 비양카 (고양이) 등
집안의 여러 대소사를 명료하게 아뢴다.
아버지는 끝으로 물으신다.
'그래. 너는 어찌 지내고 있느냐? 니 처는?'
아들은 말이 없다. 뚝뚝 눈물만 흘린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잘 살아야 했는데...'
'원~저슥은. 사내 녀석이 울기는. 더 마음 쓰지 말고 니 몸과 마음 잘 챙기며 살면 된다. 너도 벌써 예슨이구나.'
워낙 과묵하셨던 아버지는 아들이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오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그저 한 말씀만 하셨다. "원~ 저슥은". 이 말씀 뒤에 생략된 말은 둘 중에 하나다.
(날 닮아 가지고) 아니면 (괜찮다. 아들아.)이었을 것이다.
생전 화 한번 안 내시고 야단 한번 안내신 양반이니.
'아버지. 한 가지 더 보고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브런치라는 글쓰기 플랫폼에서요.'
역시나 그 답을 하신다.
'원~ 저슥은. 날 닮아가지고...'
그래. 그 사실을 깜박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여러 사업을 운영하셨으나 결국 다 접으시고,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한복가게의 셔터맨이 되셨다.
억척 순이 어머니가 시장통에서 가열차게 장사를 하시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셨고,
아버지는 셔터 (정확히는 나무로 짠 문짝 6개다. 그 시절엔 셔터가 없었으니까)를 열고 닫고 어머니의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시면서 하루를 보내셨다.
이제사 기억이 난다. 해질 무렵, 가게 한 켠에 앉으셔서 밥상보다 작은 반상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펜을 꾹꾹 눌러가며 무엇인가 적고 계시던 아버지의 뒷모습. 아버지의 글 쓰는 모습이다.
그때는 몰랐다. 아버지가 어떤 글을 쓰고 계셨는지를.
글을 쓰시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셨는지를.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 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무슨 그리도 급한 일이 있으셨을까.
어언 30년이 흘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할 때 서랍장에서 그 종이뭉치를 발견했다. 아버지의 일기다.
흘려 쓰신 글씨체라 일부만 겨우 읽게 되었다. 그날 그날의 일상의 기록과 지난한 삶의 과정과 아픔들.
그것은 아버지의 역사였다.
차차 자세히 읽어 보자하며 간직해왔던 그 종이뭉치는 결국 여러차례 이사다니는 와중에 잃어버렸다.
너무도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글 쓰는 모습마저 잃어버리진 않는다. 나에게 너무도 선명한 실루엣이니까.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여기 오늘의 시공간은 어느 날 뚝딱 이루어진 게 아닌 듯싶다.
글 쓰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비추던 그날 해질녁 노을이 오늘의 나와 연결되어 오늘도 어김없이
비추고 있다는 생각의 흐름은, 그 연속성은 왠지 든든하다.
내 뒤에는 언제나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과
용기 잃지 말고 쓰라는 아버지의 넉넉한 말씀이 언제나 함께하기 때문이다.
'자주 오겠습니다. 아버지'
인사를 마치고 준비해 갔던 음식과 도구들을 챙겨 주차장으로 이동한다.
차에 다가서서 문을 여는 순간,
차창에 비친 나의 모습.
아...
아버지를 닮아있다.
한줄 요약 :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