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영글어 가는 시간
함께 나아가고 싶은 시간 - 에세이
해마다 봄바람을 타고 원동 매화 소식이 들려오면 아이들과 기차를 타고 설레는 맘으로 꽃구경을 가곤 했었다. 매화원 둘레를 돌면서 꽃구경, 사람 구경을 하다가 잠시 쉬면서 파전을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언덕 쪽으로 올라가면 산과 낙동강, 기찻길, 매화원이 한눈에 펼쳐졌다. 때마침 기차가 지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카메라 셔터를 사방에서 눌러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하지만 올해는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꽃을 보러 갈 수 없었다. 온 세상이 코로나 19로 떠들썩하므로 ‘이 시국에!’라는 핀잔 섞인 말이 따라붙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작년에 찍어 둔 매화 사진을 보면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코로나 19 의심 환자가 발생하면 선별 진료소에서 검사가 이루어진다. 확진자는 코로나 선별검사에서 양성반응을 보인 사람이다. 확진자가 발생하면 곧바로 지역명OO번으로 불리며 격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사생활 정보 노출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그들의 이동 경로는 해당 지자체 홈페이지와 문자로 낱낱이 공개가 되었다. 자신이 사는 곳 주변에 확진자가 생겼다는 소식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혹여나 확진자와 동선이 겹치지는 않을까 불안해하며 이동경로를 살폈다. 확진자와 밀접 접촉한 사람들은 자가 격리를 해야 했고, 이를 어기고 거리를 배회했던 사람들은 뭇사람들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확진자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감염병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는 점점 더 심해졌다. 마스크 가격이 오르는 것도 모자라 품절되어 살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국가에서 부랴부랴 공적 마스크 제도를 만들었지만 그마저도 수량이 적고 정해진 요일에 구입해야 해서 사람들은 마스크를 사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약국과 우체국 앞에 줄을 서기도 했다.
비행기가 멈추고, 도서관이나 복지관, 미술관, 박물관, 영화관 앞에는 휴관이라 붙여져 있었다. 학교나 유치원, 어린이집, 학원에는 아이들이 나오지 않았다. ‘너희들이 와야 봄이야!’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만 휘날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집에서 노트북이나 태블릿을 이용해 온라인으로 접속하여 친구와 선생님을 만나고, 수업을 듣고 과제를 했다. 일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는 놀이 키트를 가정에 보내 주기도 했다. 마트에는 마스크를 낀 사람들이 주로 라면과 생수, 즉석식품을 구입해 갔다. 사회적 거리를 두세요!라는 캠페인이 도로 전광판에 보이고, TV나 라디오에서도 수시로 흘러나왔다. 주말이면 사람들은 밖에 나가지 못하고, 주로 집 안에서 가족들과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평소 이 곳, 저곳 다니기를 좋아하는 내가 집에서만 지낸다는 것은 상당히 갑갑하고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움직임이 적어지자 몸에서는 삐그덕 대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코로나 19를 겪으면서 일상생활에서 공포를 느끼고 이동에 제약이 있다 보니 태풍을 겪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은 마을 입구 삼거리 모퉁이에 있는 집으로 바로 앞에 바다가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우리 집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거나 낙서를 하기도 했고, 벽에 기대 말뚝 박기를 하며 놀았다. 그리고 삼거리에서는 초번놀이, 깡통차기, 딱지치기, 술래잡기를 하며 놀았다. 밖에서 친구들이 내 이름을 부르면 바로 나가서 놀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집 앞에 바다가 있어서 더운 여름이면 바로 멱을 감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낮잠이라도 자려고 누우면 바닷바람을 타고 짭조름한 갯내음이 날아왔고, 자갈이 파도에 부딪히는 소리가 차르륵 차르륵 났다.
하지만 태풍이 부는 날에는 사정이 달랐다. 태풍이 불어올 것을 제일 먼저 알아챘던 것은 갯강구들이었다, 시커먼 갯강구들은 바다에서 길 위로 다시 담벼락을 타고 필사적으로 기어 올라왔다. 더러는 오르다 떨어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태풍은 깜깜하고 모두가 숨죽이는 시간에 무서운 기세로 마을을 덮쳤다. 만조 때 들이닥치는 태풍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뒤로 빠진 만큼 깊숙이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부모님들과 달리 우리 4남매는 코까지 골 아가며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이른 새벽녘, 우리 집 코 앞에까지 파도가 다가왔을 무렵, 파도 높이는 점점 높아지고, 바람은 더 거세지고 빗줄기는 더 굵어졌다. 성난 파도가 혀를 날름 내밀더니 순식간에 담벼락을 집어삼켜버리고, 바람은 슬레이트 지붕을 사정없이 날려 버렸다. 천장에서는 비가 새기 시작했고, 부엌에서 가져온 스텐 세숫대야에서는 물 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부모님은 우리 4남매의 단잠을 깨웠다. 우리는 작은 방 창문을 넘어서 텃밭을 지나 뒷집 양옥집으로 피신을 했다. 평소 남들한테 부탁 한 번 잘 못하는 부모님이 어쩔 수 없이 이웃 신세를 지는 날이었다. 그 집은 우리 집이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는 데다 튼튼한 양옥집이라 그런지 고요했다.
다음 날, 밤새 태풍에 시달린 마을은 너덜너덜해 있었다. 삼거리에는 바람에 부러진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군데군데 나뒹굴었고, 바람에 날아온 비닐과 슬레이트 조각들이 도로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바닷가에는 인근 해안에서 밀려왔을 법한 플라스틱, 페트병, 비닐 쓰레기, 바다풀들이 마구 뒤엉켜 있었다. 아이들 몇몇은 소꿉놀이에 쓸 플라스틱 그릇을 줍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아침을 먹고 난 뒤 하나 둘 삼거리로 모여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우리 집 담벼락을 보고는 지난번에도 무너지더니 또 무너졌다며 혀를 차기도 했다. 그때 어린 나는 볼품없이 무너져 버린 우리 집 담벼락을 보고 있자니 창피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가장 속상해했을 사람은 바로 부모님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묵묵히 집 앞을 쓸고, 슬레이트를 치웠다. 어머니는 깨진 유리창을 치우고 장판을 걷어 빗물을 닦고, 부엌으로 들어온 바닷물을 밖으로 퍼냈다. 며칠이 지나자 옷과 이불, 라면이 들어 있는 구호물품을 전해 받았다. 고마운 일이었다. 부모님은 깨진 유리를 새로 갈아 끼우고, 회색 벽돌에 시멘트를 발라서 담을 다시 쌓기 시작했다.
태풍은 코로나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힘으로 막아내기 힘들다는 점, 위협적이고 막강한 파괴력을 가졌다는 점, 숨죽이며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점, 두렵기 때문에 소식이 궁금하여 자꾸 뉴스에 귀 기울인다는 점, 겪고 난 뒤에도 어김없이 다시 삶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점이라면 코로나 19 감염병의 유행이 태풍의 피해나 위험에 비해 보다 장기적이라서 전반적인 삶의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점일 것이다. 임모빌리티(immobility)는 코로나 등 특정한 이유로 인해 이동이 제한되는 상황을 일컫는다.
지금까지 모빌리티와 직접 대면을 중요시 여기던 사회였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물리적 환경에서의 ‘임모빌리티(immobility)’와 ‘비대면 시대'가 도래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존에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거리는 가까울수록 좋다고 했는데 이제는 팔을 뻗어 서로가 닿지 않을 사회적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서로를 위한 배려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자유롭게 들숨과 날숨을 쉬었는데 이제는 숨을 쉬거나 말을 하는 중에 침방울이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으므로 마스크를 꼭 껴야 하는 것이 사회적 약속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되도록 외출, 모임이나 만남을 자제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이는 곧 오랜 시간 우리가 믿고 따르던 가치와 정보가 아닌 새로운 가치와 정보가 밀려오므로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도래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놓치지 말고 가져가야 하는 것, 세상이 바뀐다지만 변치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의 건강과 내 가족, 주변을 챙겨야 한다. 가족과 대화시간을 늘리고 아이들의 표정이나 기분, 건강상태를 챙겨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다른 말로 삶을 이어가고 지속하기 위한 노력들- ‘돌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었던 돌봄은 ‘반농반삶’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반농반삶은 반은 농부의 삶, 반은 도시인의 삶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반농의 삶에서는 마을 언니, 동생들과 텃밭에 작물을 심어 물을 주고 가꿀 뿐만 아니라 수확한 작물은 이웃과 나누기로 했다.
그리고 반삶에서는 나에게 주어진 도시에서의 역할과 상황에 맞게끔 지혜를 발휘하기로 마음먹었다. 중학생이 된 아들과는 국민체조, 새천년 체조 동영상을 보면서 따라 해 보았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며칠 하니까 스트레칭이 되어 몸이 덜 뻐근하였다. 큰아이도 몸을 움직이니까 건강해진 것 같다며 좋아했다. 작은 아이와 베란다에 있는 화분에 봉숭아를 심고 물을 주었다. 며칠 뒤 싹이 나자 신기해했다. 또 친정엄마가 준 서리태로 직접 콩나물을 키워봤다. 물을 주고 잘 키워서 콩나물 무침을 해 먹으니 아삭아삭 맛이 좋았다. 그리고 연락이 뜸했던 친구와 마스크를 끼고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앞으로 걷기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말했다.
앞만 보고 바쁘게 돌아가던 시간이 코로나로 인해 늦춰진 것에 감사한다. 코로나 19로 인해 불편한 점도 많았지만, 내 삶과 주변을 돌아보고 성찰할 타이밍이 되어준 것은 분명하다. 용기를 내어 다시 행동하고 움직일 수 있어야 하겠다. 그래야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인 임모빌리티의 시간이 고통과 암흑의 시간이 아닌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 되고, 삶이 더욱 영글어지는 시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코로나 19로 바뀐 세상: '임모빌리티(Immobility)시대의 도래와 삶의 변화'라는 주제의 K대 에세이 공모에 출품한 글임(2020. 6.14).
*모빌리티(mobility)란 이동, 이동성으로 번역됩니다.
많은 정의가 있지만, 사람과 사물 및 정보의 이동과 이동에 내재된 의미와 실천(이용균, 2015)으로 보는 것이 저의 관점에 가깝습니다.
코로나 잘 이겨내시고, 저마다 가진 활력을
통해 성장해 나가시길 바랍니다.